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노무사 Nov 04. 2020

실패의 시대

멀어지고 작아진다.


 오늘 09:00에 제29회 공인노무사 시험 2차 결과가 발표됐다. 3차 면접이 남아 있으니 2차 시험에 합격한다고 해서 노무사 자격증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3차 면접은 통과의례다.(변호사, 회계사, 변리사, 세무사, 법무사, 관세사, 감정평가사와 함께 소위 8대 전문자격시험으로 불리는 시험 중 노무사만 유일하게 면접이 남아 있다. 시험의 타당성 측면에서도, 취지 측면에서도 폐지가 바람직하다. 선발도구로써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하는데 2차 시험에 통과해 업무 수행을 위한 최소한의 전문지식을 평가받은 이들에게 여전히 테스트를 요구하는 것은 제도적 갑질 아닐까.) 시험에 합격한 이후에도 매 회 치러지는 노무사 2차 시험 문제를 살펴보고 있고, 매 회 발표날이면 신경이 쓰인다. 예전 생각이 나기도 하거니와 노무사 시험에 몇 년째 도전하고 있는 지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바람들이 욕심이 되는 시대다. 마스크 없던 시절이 욕심인 시대고, 맑은 공기가 욕심인 시대고, 정규직이 욕심인 시대고, 안전한 작업환경이 욕심인 시대고, 일자리 자체가 욕심인 시대다. 무언가를 원하는 게 욕심이라는 이야기는 그 무언가가 '쉽게는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쉽게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욕심은 대부분 '실패'라는 결과로 좌절된다. 예전에는 당연했던 것들 이제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남들보다 앞서야만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되었다. 실패의 시대다.


  필자가 공인노무사 시험을 치렀을 때에는 1년에 250명의 노무사를 선발했고 250자리를 위해 약 4,000명 정도가 경쟁했다. 하지만 343명이 합격한 올해 29회 시험에는 약 8,000명이 지원했다고 한다. 필자가 시험을 치를 때는 3,750명만이 실패를 감당하면 됐지만, 올해는 약 7,700명이 실패를 감당해야 했다. 접수인원이 2배가 된 만큼 실패를 감당해야 하는 인원도 2배다. 실패가 더 당연해지는 이런 현상은 꼭 전문자격시험에서만 발생하는 현상이 아니다. 모든 시험과 일자리 경쟁에서 발생하고 있다. 시험과 일자리 경쟁에서 성공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실패 없는 시대를 살 수 있는 것 아니다. 매 순간 직장에서 그리고 사업장에서의 경쟁과 시험으로 크고 작은 실패를 감당한다.


  시험을 치른 지인들이 모두 실패를 감당하고 있다. 시험 합격이 주는 이점은 과거에 비해 줄었는데 불합격이 주는 괴로움은 과거나 현재나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지인들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잘 알고 있다. 그 때문인지 과연 실패의 시대에 우리가 추구해야 될 태도가 ‘더 치열해지는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 어떻게 그보다 더 치열해질 수 있을까. 더 치열해짐으로써 실패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실패에서 괴로움을 지우고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우는 게 실패의 시대에 나를 지키는 태도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패배주의에 빠져들자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실패가 나의 노력의 정도와 무관하게 당연히 찾아오는 시대이니 하는 말이다.


  A4 용지를 바로 코앞에 두면 내 눈에 보이는 모든 세상이 A4 용지에 가려진다. 조금씩 멀어질수록 내 시야의 가장자리부터 세상이 보이기 시작하고 적당히 멀어지면 210*297mm이라는 A4 용지의 본래 크기가 보인다. 그리고 완전히 멀어지면 A4 용지는 사라진 세상이 시야를 채운다. 실패도 실패 직후에는 내 시야를 모두 가릴 정도로 거대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거리가 멀어지면 본래의 크기로 보이기 시작하고 끝내는 사라진다. 지금 내 시야를 모두 가린 실패가 시간이 지날수록 작아지고 멀어질 것이라는 사실 그나마 위안으로 삼아야 할까.


  3년 전쯤 교수님의 요청으로 학교 후배 3명의 2차 답안지를 첨삭해 주며 공부를 도왔던 적이 있었다. 2년 동안 준비한 2차 시험에서 모두 불합격했었는데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1년만 더 공부해 보라고 설득했었다. 다시 치른 2차 시험에서 3명 중 2명이 불합격하고 1명이 합격했다. 책임지지 못할 나의 설득으로 2명의 후배가 시간을 허비한 것 같아 굉장히 괴로웠는데 합격한 후배가 발표 직후 보낸 문자 덕에 그나마 위안이 됐다. 선배님이 1년 더 해보라고 해주셔서 합격할 수 있었다는 문자였다. 이번에는 지인들에게 어떤 권유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노력과 상관없이 당연한 실패가 만연한 시대여서 더욱 그렇다.

작가의 이전글 코로나 시대의 인재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