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을 알려주고, 심판을 봐주며, 중재를 하는 자
통계를 보니 '공인노무사'를 키워드로 검색해 글을 읽으신 분들이 많았다. 근로자들의 노동감수성이 높아지면서 공인노무사라는 직업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기 때문인 것 같다.(요즘 시험 경쟁률과 합격률을 보면 정말 시험 빨리 붙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번 글은 많은 분들이 검색하셨던 노무사를 주제로 써보고자 한다. 특히 웹툰 '송곳', 영화 '또 하나의 약속' 등에 등장하면서 상대적으로 잘 알려진 (여전히 부족하지만...) '필드 노무사(=노무법인 소속 또는 개업 노무사)'가 하는 일 보다는 조직에 속해서 일하는 사내 노무사들의 역할에 대해 써보려 한다.
종속 노동을 다루는 전문가이면서 종속되어 일하는 노무사들은 과연 회사에서 무슨 역할을 할까?
(주의: 기업의 규모, 조직문화, 업종 등 다양한 요인에 따라 사내노무사의 역할은 달라질 수도 있음)
기업마다 노사관계는 각양각색이다. 임원진과 노동조합이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기업도 있고, 임원진이 노동조합 간부같고 노동조합 간부가 임원 같이 느껴질 정도로 상호 배려와 신뢰가 돈독한 기업도 있다. 기업마다 노사관계가 천차만별이지만 모든 기업의 노사관계에는 공통점이 한가지 있다. 바로 '언제든 상황은 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어제의 적은 오늘의 동지이고, 오늘의 동지는 내일의 적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딱 들어 맞는다. 임원진과 노동조합은 태생적으로 원하는 바가 다르다. 우연히 니즈가 맞아 떨어져 어느 순간 같은 목적을 갖는다 해도 대부분 상호 대립관계에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원하는 바가 다른 두 당사자를 모두 충족시켜 야 하는 역할을 사내 노무사가 해야만 한다. 양다리와 줄타기에 능해야 된다는 이야기다.
인사노무와 관련해 예민한 이슈가 발생하면 임원진과 노동조합 간부 모두한테서 연락이 온다. 휴대전화가 울리는 순간 부터 선택의 기로에 선다. 어느쪽의 연락을 먼저 받아서 정보를 취하는게 나을까? 노동조합의 요구사항을 먼저 파악해야 할지, 임원진의 저지선을 먼저 가늠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순간이다. 깊은 고민 끝에 어느 한 쪽의 연락을 받지만 나의 고민은 늘 헛것이다. 그 어느쪽도 먼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야기 하지 않고 상대의 의중이 무엇인지 파악해 달라고 요청하기 때문. 그렇다면 이제 빙의의 시간이다. 나는 임원진으로 빙의되어 임원진의 저지선을 짐작하고, 노동조합 간부로 빙의되어 노동조합의 요구사항을 짐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줄다리기의 시작점이 정해지면 수많은 보고와 협상을 거치게 되고 그 모든 과정의 중심에서 법률검토와 의견전달자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노동조합과 단체협약을 체결하기 전 단협의 문구를 검토하고 향후 발생 가능한 리스크 등을 보고한다. 노동관계법령이 개정됨에 따라 기업의 인사관리에 미칠 영향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필요하다면 개정된 노동관계법령에 대한 임원진 또는 내부직원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하기도 한다. 또한 인사노무관련 사규 제개정 역시 사내 노무사 몫이다.
노동관계법률이라고 하면 대부분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법만 떠올리고, 사규라고 하면 취업규칙과 인사규정만을 떠올리지만 노동관계법률은 생각이상으로 방대하고(공인노무사의 직무범위에 속하는 법률만 33개쯤 된다.) 사규 역시 언제 만들었는지도 모를 규정이 넘쳐난다. 헌법-노동관계법-단체협약-규정-규정세칙-지침이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규정 관리를 꿈꾸지만... 역시 꿈은 꿀 때 아름답다.
노무사를 단순히 노동법률전문가로만 알고 있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노무사 시험은 법학 과목이 반이고 경영학 과목이 반이다. 실제 필드에서도 노동관련 법적 분쟁을 해결하는 역할 뿐만 아니라 HR컨설팅을 수행하며 수익을 창출하는 노무사님들이 상당수 계신다. 간혹 분쟁 상태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싫다며 HR컨설팅만을 업으로 하시는 분들도 보인다. (개인의 성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업무의 폭이 넓은 노무사의 장점이 아닐까 싶다.)
사내 노무사 역시 마찬가지다. 노동조합에 대응하고, 노동관계법률에 대한 검토만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경영학적 관점에서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인력 관리를 위해 인사제도를 기획하고 이를 운영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통상적으로 새로운 인사제도를 설계하는 경우 외부 전문가(노무법인, 컨설팅펌 등)와 협력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전문지식을 갖추고 내부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노무사가 중요한 역할을 해줘야 한다. (사내 노무사의 역량과 관심이 컨설팅 결과물의 퀄리티에도 큰 영향을 준다.) 또한 인사제도를 설계하고 운영하는 모든 과정에서 노동법적 이슈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사내 노무사는 이 점을 항상 고민하고 리스크 관리를 할 필요가 있다.
기업운영을 하다보면 많은 노동분쟁이 발생한다. 해고, 부당전직, 임금, 근로시간, 근로감독에 따른 노동법 위반 사항 적발 등등... 이러한 노동분쟁이 발생하면 사내 노무사는 수많은 보고와 회의를 통해 초기 대응을 해나가야 한다. 분쟁이 사건화 되는 경우(노동청, 노동위원회, 소송 등) 외부 노무법인과 법무법인에 사건 의뢰를 하고 내부 조력자 역할을 하기도 한다. 노무법인의 노무사님들은 사내 노무사보다 사건 경험이 풍부하지만 분쟁이 발생한 기업 내부의 사정은 사내노무사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외부 노무사님이 놓칠 수 있는 정보를 캐치해 주고, 입증에 도움이 될 만한 자료들을 수집해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이유다.
가끔 직접 사건 수행을 해야 되는 경우도 생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사내노무사님들이 직접 사건 수행하는 것을 추천드리고 싶지는 않다. 한때는 함께 일했던 동료에 대한 불이익 조치가 정당하다고 주장하는게 썩 기분 좋은 일도 아니거니와, 사건에서 지게 되면 ....... 눈치 밥은 체한다.
상기 기재사항 외에 온갖 많은 일들을 담당한다. 조직에 속해서 근로를 제공하고 임금을 받는 입장이니만큼 시키면 해야되는 것은 당연하다. 노무사의 전문분야가 아님에도 노무사라는 이유로 담당해야 하는 일이 생기고 인사노무관련 회의가 아님에도 노무사라는 이유로 온갖 회의에 집어넣어 정작 내 일을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어떤 노무사님들은 소위 '노무밥'만 먹는것 보다는 다양한 일을 해보는게 리프레쉬가 된다고 웃으며 말씀하시던데... 개인적으로는 공감하기 어려웠다.
필드 노무사의 진로와 사내 노무사의 길이 크게 다른것이라고 생각치는 않는다. 노무사로서 역량을 키워가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필드 노무사는 많은 케이스와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역량을 쌓아가는 것이고 사내 노무사는 문제가 발생하는 조직 내부로 들어가 직접 경험해 보는 방식이랄까? (노무사가 다루는 법률과 노동이라는 주제의 특성상 직장에 취업해 근로자로 일해보는 경험 자체가 노동관계법률과 노동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다만 사내 노무사는 필드 노무사만큼 살아있는 전문지식을 습득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향후 필드로 다시 나아갈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공부하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조직이 주는 안정감에 취해 감이 무뎌지면 다시 노무사의 본업으로 돌아갔을때 꽤 힘들어 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공인노무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만큼, 근로자와 사업주 모두가 노동법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길 바란다. 특히 노동관계법령 준수 의무 주체인 사업주(=임원)들이 '준 노무사' 수준의 지식을 갖춰, 사내에서 노동 이슈가 발생해 긴박한 대처가 필요할때 ㄱ,ㄴ 부터 설명하며 마음 졸이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