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餘)에 관하여.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하나의 작은 이야기를 인용해보고자 한다. 이 이야기는 예전에 내가 프랑수아 줄리앙의 『무미예찬』이란 책을 스터디 하던 중에 들었던 이야기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깊은 감동을 받게 되었는데 이 이야기를 통해 필자는 부재에 관한 이야기, 혹은 은연중에 향기를 남긴 여(餘)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송나라 휘종 황제는 그림을 몹시 좋아하는 임금이었다. 그는 곧잘 유명한 시 가운데 한 두 구절을 골라 이를 화제로 내놓곤 했다. 한 번은 ‘어지러운 산이 옛 절을 감추었네.’란 제목이 출제되었다. 깊은 산 속의 옛 절을 그리되, 드러나게 그리면 안 된다는 주문이었다. 화가들은 무수한 봉우리와 계곡, 그리고 그 구석에 보일 듯 말 듯 자리 잡은 퇴락한 절의 모습을 그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1등으로 뽑힌 그림은 화면 어디를 둘러보아도 절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대신 숲 속 작은 길에 중이 물동이를 지고 올라가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중이 물을 길러 나왔으니 가까운 곳 어딘가에 분명히 절이 있겠는데, 어지러운 산에 가려 절은 보이지 않는다. 절을 그리라고 했는데, 화가는 물 길러 나온 중을 그렸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여백, 무미, 여음과 여미라 일컬어지는 부재에 대한 중국의 지혜를 느낄 수 있으며, 그 아름다움 또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부재에 대한 사유를 가장 불러일으키는 사상은 중국에서도 도가가 아닐까 싶다. 도가에서는 유가 있음은 무가 있음을 드러낸다는 점을 명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부재를 통해 현전을 드러내’려는 하이데거와도 맞닿아 있다. 물론 하이데거가 부재를 통해 현전을 드러내려고 한 것이라면 도가의 사상은 有가 있음은 마땅히 無가 있기 때문임을 우리에게 환기시킬 뿐이다.
도는 하나를 드러내고, 하나는 둘을 드러내고, 둘은 셋을 드러내고, 셋은 만물(萬物)을 드러낸다.
(道生一, 二生一, 二生三, 三生萬物.1)
도가에서는 분명히 우리가 망각한 점을 알고 있었다. 有는 가름을 통해 드러내어졌을 뿐이라는 점이다.
다시 물 긷는 중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동양 예술을 여백의 미라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無의 아름다움, 혹은 가름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며, 동양 예술은 심미적 감각에서 그것들을 효과적 사용하였다. 우리는 여음과 여미의 의미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여음이란 국어적인 의미로 ‘소리가 그치거나 거의 사라진 뒤에도 아직 남아 있는 음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 국악에서 형식적2)으로 구성되어 있을 만큼 동양 음악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왜냐 하면 효과적이고 아름다운 음악은 음을 최대한 동원하거나 강렬한 음이 아니라 감각을 넘어서는 음의 가능성을 느끼게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여음은 결정적으로 실현되지 않았으므로 한층 더 연장되고 심화될 수 있으며, 따라서 한층 더 의미심장해진다. 이런 음악은 귀가 아닌 정신에 남아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여미란 국어적인 의미로 음식을 먹고 난 뒤에 입에서 느끼는 맛으로서 드러나지 않은 맛을 드러내며, 여음과 마찬가지로 맛의 여운은 다함이 없는 잠재적 가치를 환기하며, 실제로 맛볼 수 없는 만큼 한층 더 바람직한 어떤 것이 된다. 우리는 절제함으로써 한층 더 확장되는, 삼감으로써 다함이 없게 되는, 담백함을 통해 감각을 취하게 하는 것이 아닌 의식을 일깨우는, 도를 맛보게 하고 회복시킨다.
1) 《도덕경道德經》 第四十二章
2) 우리 전통 음악의 한 형식. 의 경우 1~7장의 각 장마다 있는데, 각 장 32장단 가운데 열세 번째에서 스무 번째 장단까지 관현 합주로 되었고, 가곡에서 기악 전주곡이나 후주곡으로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