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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랑꼴로지 Jul 03. 2018

생성=소멸=유지

노자의 道

생성=소멸=유지

  도가에서 말하길 도(道)는 우리의 삶과 무관계이다. 道는 가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道는 우리에게 어떻게 드러나는가? 그리고 道에 대한 우리의 물음은 어떻게 우리의 삶의 도움을 줄 수 있을까?  道는 우리에게 어떻게 드러나는가. 그렇다면 道가 드러나기 이전이 있는 것일까? 노자(老子)는 ‘도는 숨어 있어 이름이 없다’고 말한다. ‘도는 숨어 있다’라는 말의 의미는 道가 전적(全的)인 드러남이다. 그것은 만물(萬物)의 만물(萬物)됨, 즉 물(物)과 물(物)간의 가름을 포용하면서도, 본질적인 가름인 없음(無) 마저 포용하면서도, 스스로는 어떤 것과도 가름이 없는 드러남이다.1) 전혀 가름이 없고, 전혀 감춤이 없는 드러남은 역설적이게도 전혀 드러남이 없다. 이러한 道의 특성을 소식(소동파)의 <제서림벽>에서 맛볼 수 있다.



제서림벽(題西林壁) 2)

소식蘇軾

가로 보면 고개요 모로 보면 봉우리
멀고 가깝고 높고 낮아 모두 다르다
이 산의 참 모습을 모르는 것은
이 몸이 저 산속에 갇혀 있는 탓일세

橫看成嶺側成峰(횡간성령측성봉)
遠近高低客不同(원근고저객부동)
不識廬山眞面目(불식여산진면목)
只緣自在此山中(지연자재차산중)


  속에 갇혀 있기에 산의 진면목을 볼 수 없듯이, 눈부신 태양 아래서는 햇살을 볼 수 없듯이, 道가 전적으로 드러나 있기 때문에 우리는 道를 볼 수 없다. 도의 전적인 드러남은 그 드러남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드러남은 ‘전혀 드러나지 않음’으로, 다시 말해 ‘숨어 있음’으로 보여 진다. 道는 ‘나’를 포함해 모든 가름 지어져 존재하는 것들과 전혀 가름 없이 드러나 있다. 구름을 뚫고 한 줄기 햇살이 내려 비칠 때 우리는 비로소 햇살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가름 지어졌을 때만 일부분을 볼 수 있다. 道의 그 전적인 드러남과 마주 설 수는 없다.


도는 하나를 드러내고, 하나는 둘을 드러내고, 둘은 셋을 드러내고, 셋은 萬物을 드러낸다.
(道生一, 二生一, 二生三, 三生萬物.3)


  道에서 하나가 드러난다. 이 하나는 ‘하나의 것’이 아니다. 드러나는 것은 가름에서 비롯되는데, 道에서 그 가름은 (드러나)있음과 (드러나)없음의 가름이다. 그 드러남은 있음의 드러남이든 없음의 드러남이든 무엇의 드러남이든 드러남은 하나로 드러난다. 道가 하나를 드러냄[生]으로써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 하나의 드러남은 있음의 드러남 하나와 없음의 드러남 하나, 드러남 둘을 드러낸다. 있음의 드러남 하나와 없음의 드러남 하나, 이 드러남 둘은 다시 있음의 드러남 하나, 없음의 드러남 하나, 그리고 있음의 드러남과 없음의 드러남이 합쳐진 전체로서의 전혀 드러나지 않은 전적인 드러남 하나를 더해, 드러남 셋을 드러낸다. 이때, 있음의 드러남과 없음의 드러남이 합쳐진 전체로서의 드러남은 ‘道生一’에서 드러난 하나의 드러남과 다름이 없다. ‘셋은 萬物을 드러낸다(三生萬物)’고 한 것은 앞에서 본 드러남 셋이 萬物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이때 드러남 셋은 하나, 하나, 하나 세 드러남이면서 동시에 전체로서 하나의 드러남이기도 하다.


  우리가 ‘너’와 ‘나’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은 너와 나 사이에 가름이 있기 때문이다. 전체 속에서 서로 가름 사이에 서로가 있다. 그리고 그 ‘있음의 드러남’ 사이 ‘없음의 드러남’이 있다. ‘있음의 드러남’과 ‘없음의 드러남’ 그리고 그 모두의 드러남 ‘전체’가 ‘셋’이다. 그 셋은 세계를 말하며 우리들은 드러나 있는 것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세계가 바로 드러나 있음이다. 이 ‘셋’은 단지 드러나 있는 것의 세계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이루는 모든 것을 이루고 있다. 우리는 생성, 유지 소멸을 경험한다. 나는 세상에 태어나와, 살다가, 죽는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며 생성, 유지, 소멸 속에서 매순간 변화를 겪고 자기동일성의 문제와 싸운다. 

  바슐라르가 『촛불의 미학』에서 순간에 대한 찬양은 매순간의 ‘나’에 대한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일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만이 나를 의미하지 않는다. 순간의 순간 생성하며 소멸하고 유지하는 모든 것이 ‘나’이다. 나는 있음의 드러남이며, 그 드러남은 없음의 드러남이 함께 지속됨으로서 유지된다. 나의 완전한 소멸, 죽음에서 드러나는 나의 없음의 드러남은 나의 유지, 나의 있음과 함께 숨겨져 드러나 온 없음이면서 동시에 다른 의미를 지니는 없음의 드러남이다. 즉 나의 없음은 있음 전체와 짝하는 다시 말해 있음 전체를 드러내는 없음의 드러남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인 생성, 유지, 소멸이 道에서 하나가 드러나고, 하나에서 둘이 드러나고, 둘에서 셋이 드러나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나의 잉태, 나의 탄생, 나의 드러남은 하나의 한 드러남이며 그것은 곧 도가 하나를 드러냄이고, 그러기에 바로 도의 드러남이요, 도의 탄생이다. 나의 소멸, 나의 죽음, 내가 없음은 또 하나의 하나를 드러내는 또 하나의 한 드러냄이니, 바로 도의 드러남이다. 모든 하나인 것의 드러남(생성=소멸=유지)이 모두 그렇다.”4)


  우리는 道 속에 있다. 아니, 道와 우리는 무관계이기 때문에 道 속에 있다는 말은 잘못된 표현이다. 우리가 道의 드러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道에 대해 알아가고, 道를 맛보려고 하는 것이겠다. 道를 알아가는 것은 ‘나’를 알아가는 것이고, ‘우리’를 알아가는 것이며, ‘세계’를 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하나(一)의 드러남이다. 순간의 순간 생성, 유지, 소멸하는 ‘나’는 모든 하나인 것의 드러남이고, 도의 드러남이다. 




1) 박정근, 「老子 《道德經》 硏究(一) - 道를 던져버리기 위한 첫걸음」, 1993.

2) 소식, 『소동파 시선』, 류종목 옮김, 지만지, 2011, P. 32.

3) 《도덕경(道德經)》 第四十二章.

4) 박정근, 「老子 《道德經》 硏究(一) - 道를 던져버리기 위한 첫걸음」,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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