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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Lee Mar 22. 2022

잠시 길을 잃어도 좋을 동네

주말에는 생기 넘치는 <라 라티나>에서

내가 어떤 도시에 머무를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그 도시의 교통수단과 친해지는 것이다. 일단 교통수단에  익숙해지면 긴장감이 줄어들고 마음에 느긋함이 생긴다. 길을 잃어도 집에는 갈 수 있다는 안도감이다. 마드리드에서는 주로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 현지인이 아니라면 버스 노선을 파악하는 것이 훨씬 어려운 데다, 교통 체증도 만만치 않은 마드리드에서 역시 최고의 이동수단은 지하철이다.

마드리드의 지하철은 런던이나 파리와 비교해 훨씬 쾌적하고 깨끗하다. 내가 최고로 꼽는 베를린 지하철보다는 살짝 못하지만, 노선 간 연결이 효율적이고 배차 간격이 무척 짧아 눈 앞에 문이 닫히려는 지하철이 보여도 뛰어야 할 필요를 못 느낀다. 서울보다 도시 규모가 작아서인인지 확실히 지하철 노선도 덜 복잡하다.


마드리드의 3월은 1  비가 가장 많이 오는 달이다. (그것까지는 몰랐다. 그저 비가 오는 날이 많겠다 예상은 했는데, 막상  보니 생각보다 비도 많이 오고 날씨도 춥다!) 원래 웬만한 거리는 걸어다니는데 요즘  오고 추운 날이 많아 지하철을 타고 다니다 보니 지하철 타고  동네  동네 다니는 재미에  빠졌다.

지난 토요일과 일요일, 연달아 '라 라티나'(La Latina)에 갔다. 토요일에는 요바나와 라 라티나 극장에서 연극을 보고 근처 일식당에서 함께 라멘을 먹었고, 다음날에는 혼자 일요일마다 열리는 라스트로 벼룩시장을 구경했다. 라 라티나는 여러 번 가본 동네지만 볼거리가 많아 갈 때마다 새롭다. 핸드메이드 소품가게, 빈티지 옷가게, 다양한 원산지의 스페셜리티 커피를 파는 카페, 저렴한 바부터 고급레스토랑, 스페인 전통음식을 파는 식당부터 채식레스토랑까지 음식도 입맛대로 고를 수 있다. 서울로 따지면 홍대에서 합정으로, 이어 망원동, 연남동으로 이어지는 힙한 동네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랄까? 아무래도 젊은 층이 주를 이루지만 추에카나 말라사냐에 비해 다양한 연령대가 어우러진다는 점도 맘에 든다. (어느새 10대 20대만 바글바글한 동네에 가면 어쩐지 불편한 나이가 되었다!)


토요일에 본 연극 제목은 <Una noche con ella> (그녀와 하룻밤을)로, 스페인에서 50년 연기인생을 이어온 60대 여자배우 '롤레스 레온'이 주연을 맡았다. 작품은 그녀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코미디극으로, 뮤직홀과 카바레의 옛 추억을 소환하는 노래와 춤을 메인 메뉴로 한다. 쉴 새 없는 유머로 시종일관 사람들을 웃게 했지만, 반 이상이 강도 높은 성적 농담이라 내 스페인어 수준으로는 이해불가. (사실 이해했다 하더라도 그렇게 웃지 않았을 것 같다. 이것이 바로 문화차이!)

딱 내 취향의 공연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로써 '한달살기 중 버킷 리스트'에 있었던 '극장에서 연극 보기'를 달성하고 나니 마음이 뿌듯했다. 마드리드에서 연극을 본 건 이번이 처음. 음악 공연은 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상관없지만 언어가 주된 매개체인 연극은 엄두를 내기 힘들었다. 이번에는 꼭 도전해 보려 했는데 우연히 요바나가 친구한테 추천 받은 이 연극을 보고 싶다고 하길래 의도적으로 덥석 미끼를 문 것이다.

어떤 도시에서 극장에 간다는 건 나에게 특별한 의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가 연극보기인데 그것을 내가 사는 도시에서 즐길 수 없다면 많이 슬플 것 같다.


연극을 보고 간 일본라멘집은 일본문화를 사랑하는 스페인 젊은이들의 취향에 딱 맞는 메뉴와 분위기였다. 요즘에는 구글로 맛집을 검색해서 찾아가는 게 일반적이라, 나도 여행을 할 때는 주로 구글맵과 구글 검색으로 먹을 곳을 결정한다. 걷다가 무작정 눈에 띄는 곳에 들어가 밥을 사 먹던 재미는 사라졌지만 식당을 검색하다 찜한 곳을 기대감을 안고 찾아가는 재미도 크다. 흐리고 쌀쌀한 날씨에 어울리는 뜨근한 국물이 먹고 싶어 찾은 이곳은 채식식당이 아닌데도 내가 고를 수 있는 채식메뉴가 여러 개 있고 맛도 있어서 요바나와 나 둘다 만족했다. 음식에 곁들여 마신 레드와인 한 잔에 취기가 올라 부끄러움 없이 열심히 스페인어로 떠들고 났더니 확 피곤이 몰려왔다. 요바나와 헤어져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는데, 문득 내가 보낸 하루의 시간이 더 없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마치 이 도시에 오래 살았던 것처럼 지하철의 소음도 서늘한 밤공기도 자연스럽게 나의 삶에 스며들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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