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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Lee Mar 18. 2022

미세먼지에 실려온 어떤 그리움

어디에 살든 힘든 날이 있어요


미세먼지가 하늘을 뿌옇게 뒤덮은 날이다. 사하라 사막에서 날아온 붉은 먼지(polvo rojo) 때문이라는데, 이건 거의 서울의 미세먼지 나쁜 날 수준이다. 아침부터 목이 칼칼하고 눈도 따끔따끔하다. 유럽의 대도시 공해 문제가 심각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마드리드도 예외가 아닌 모양이다. 미세먼지가 이 정도로 나쁜 경우는 없었다고 하지만 더블린에서는 전혀 경험하지 못해본 일이라 잠깐 현타가 왔다. 서울과 비슷한 대도시의 장점에 많이 끌리고 있던 차였는데, 이렇게 마드리드에 사는 것의 부정적인 면도 알게 된다.

하지만 어차피 지구상에 천국은 없다. 어느 곳에 살든지 좋은 점 안 좋은 점이 있기 마련이고, 자신의 관점에서 그 둘의 무게를 견주어 살 곳을 결정하고 난 뒤에는 좋은 점에 초점을 맞추고 안 좋은 점은 그냥 안고 가는 거다. 사람은 어디에 살든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환경에 적응하기 마련이고, 그 다음 행복에 대한 문제는 모두 생각과 마음에 달렸으니까.


오늘은 흐린 날씨 때문인지 기분이 좀 가라앉는다. 이런 날은 늘 사람들이 보고 싶다.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 아일랜드에 있는 존 생각을 하며 하루를 보냈다. 카톡으로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 친한 친구들 그룹이 있는데 계절별로 한 권씩 같이 책을 읽는 독서모임을 시작했다. 오늘 아침 단톡방에서 봄에 만나는 첫 모임을 언제 어디서 할 것인지 얘기하다가 주말여행 겸 제주도에 가서 하자는 결정이 났다. 바로 비행기표 질러! 하는 들뜬 분위기로 대화가 막을 내릴 때, 나는 반대로 마음이 힘들어진다. 4월 초의 꽃 피는 제주도에서의 회동이라, 얼마나 즐거울까? 만나기만 하면 밤을 새도록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우리들인데, 나는 그곳에 함께 있을 수 없다. 일단 나는 아일랜드에서 줌으로 참여하기로 했지만 어쩌면 함께 있으나 함께 있을 수 없는 그 시간이 더 힘들 수도 있다. 아일랜드와 스페인의 거리만 되어도 정말 한국에 자주 갈 텐데. 오늘따라 한국까지의 거리가 끝없이 멀게 느껴진다.


아일랜드는 2주 후면 돌아갈 곳이라 그다지 그립지는 않지만 성패트릭스데이인 내일 아일랜드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조금 슬프다. 아일랜드의 특별하고 가장 큰 축제인데다 올해부터 성패트릭스데이를 기념하는 빨간 날이 하루 더 늘어 온 나라가 며칠간 떠들썩할 것이다. 초록색 옷을 입고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서 존과 함께 거리를 걷고 거품 진한 기네스도 한 잔 하고 싶다. 그렇다고 아일랜드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은 아니다. 가능하다면 마드리드에 좀 더 오래 있고 싶다. 그냥 괜히 멜랑콜리 해져서 하는 말이다. 외국살이를 하다보면 이런 날이 생각보다 자주 찾아온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경험을 통해 배웠다. 쓸쓸한 순간들은 힘들게 견뎌내기보다 가볍게 흘려보내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걸. 그 중에서도 좋은 사람과 재밌는 일을 함께 하는 게 최고다.


컨디션은 별로지만 기분 전환을 위해 저녁  요바나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갔다. 수요일은 거의 모든 극장에서 특별요금으로 싸게 영화를   있다. 에스파냐광장 근처에 더빙을 하지 않은 오리지널버전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이   있는데,    곳에서 홍상수 감독의 2021년작 <인트로덕션> 상영 중이었다. 한국문화에 관심이 많은 요바나 덕분에 오랜만에 귀의 긴장을 풀고 편안하게 한국영화를 봤다. 홍상수 영화는 빼놓지 않고 보는 편인데  영화는  별로였다. 베를린 영화제 각본상 수상의 이유가 뭘까 의심스럽다. 영화가 좋았으면  좋았겠지만, 어쨌든 친구랑 무언가를 하고 나니 기분이 나아졌다. 집에 돌아와 남은 커리를 데우고 두부와 호박을 프라이팬에 구웠다. 따뜻한 음식을 먹으 마음이   따뜻해질까 싶은 기대.

쓸쓸했지만 잔잔한 위로가 있었던 하루가 간다. 내일은 성패트릭데이를 기념하는 초록색 옷을 입고 가벼운 산책을 조금 길게 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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