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사랑하지 않는, 술은 분위기로 먹는다는 당신에게 보내는 오지랖
0. 스무살부터 나는 꽤나 많은 사람들과 술을 마셨다. 부모님과 누나, 가족에서부터 친구, 동기, 교수님, 직장동료, 직속 상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과 술을 마셨다. 그 중에는 술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고, 마시지 않는 사람도 있었으며, 술을 잘하는 사람도, 술을 잘 못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술을 좋아하냐고 물으면 열 중에 다섯, 여섯은 술 자체보다는 술자리의 분위기가 좋다고 이야기 한다. 보통 술을 마시긴 하지만 술보다는 술자리의 분위기가 더 좋아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말만 못할 뿐 그런 사람들 중에는 술은 싫지만 술자리의 분위기가 좋은 사람도 심심치 않게 있었을 것이다.
대체 왜일까. 술이 얼마나 맛있는데.
아마 이런 상황은 우리가 술을 좋아하냐 물을 때 암묵적으로 지칭하는 '술'이 소주와 맥주(정확하게는 희석식 소주와 흐릿한 라거 맥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소주, 우리나라의 술문화 한 가운데 희석식 소주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아주 아주 결정적으로
그 소주란 것이 맛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 여기서부터 술에 대한 기본 상식이 조금 필요하다. 술은 곡식이나 과일을 발효해서 만든 발효주가 있고, 이 발효주를 증류 (끓여서 기화되는 물질을 모으는 것)해서 만드는 증류주가 있다.
대표적인 발효주로는 맥주, 와인, 막걸리 등이 있고 대표적인 증류주에는 위스키, 브랜드, 소주가 있다. 정-말 복잡한 걸 아주 많이 생략해서 간단히 설명하면 ‘맥주를 증류하면 위스키, 막걸리를 증류하면 소주’ 라 할 수 있다. (옷은 상의와 하의로 이루어진다. 수준의 간략함입니다.)
1. 술자리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주를 마시면 안주나 물을 입 속에 집어넣기 바쁘고 술의 질감이나 향, 맛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럴만도 한 것이 희석식 소주는 맛과 향이 거의 없다.(아예 없는 것은 아니긴하다. 술맛이 나긴하지...)
곡물을 극단적으로 증류해서 에탄올(에틸알코올) 그 자체만 남긴, 주정이라는 것에다가 물이랑 약간의 첨가물을 타서 만드는 것이 희석식 소주, 우리가 매주 마시는 초록병 속 술이다.
간단히 얘기하자면 희석식 소주는 물 탄 보드카라고 보면 된다. (희석식 소주는 절대로 보드카가 아니고, 물뿐만 아니라 많은 것들이 첨가되지만 대-충 묘사하자면 그렇다. 보드카 애호가 및 관계자분들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올립니다.)
주정은 술을 여러번 끓이고 모으고를 반복해서 알코올만 남겨놓은 것이기 때문에 알코올 외엔 다른 풍미나 맛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게다가 술을 만들 때 쓰는 곡식들도 양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알코올향과 잡내를 없애기 위해 감미료나 인공적인 향을 집어넣는다.(때때로 타피오카도 주정의 재료가 된다. 밀크티의 그 버블말이다.) 결국 희석식 소주는 착향 알코올 수준의 것이다.
물론 병당 천원대의 가격을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타당한 맛의 술이다. 전 세계적으로도 매우 저렴한 가격대의 술이며, 이 가격대의 증류주는 거의 없다. 그러니 소주가 맛이 없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것이며 ‘왜 맛이 없어!’ 라고 따질 일은 아니다. 오히려 가격을 생각하면 품질이 꽤나 준수하게 여겨지기까지 한다. (잊지 말자. 내가 마시는 소주는 도매가로 콜라와 가격이 비슷하다. 술인데!)
2. 문제는 우리가 술을 마시게 되는 거의 모든 상황에서 접하게 되는 것이 이 희석식 소주라는 점이다.수많은 사람들이 이 소주로 인생에서 술이란 것을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인생 첫번째 술로 소주를 마시면서 사람들은 ‘술이란 쓰고 독하고 맛이 없는 것이구나’ 라는 인상을 받는 경우가 많다. 물 탄 보드카처럼 직선적인 술을 그렇게 들이켜댔으니 술에 대한 첫인상이 곱지 않은 것도 당연하다. 그런 인상이 쌓이다가 소주를 마지막으로 술을 아예 안마시는 사람도 많이 봤다. 내 주변에도 그렇게 금주한 사람들이 꽤 있고, 술을 부득이하게 마셔야할때는 맥주만 찾는 사람도 꽤나 많다.
3. 물론 맛이라는 것이 단순히 혀에 와닿는 것만으로 정의되지는 않는다. 소주가 주는 여러가지 이미지는 소주를 찾게 하는 이유가 되고, 그게 다시 소주의 술맛이 된다. 서럽고 외로울 때 소주만한게 없고 기쁘고 왁자지껄하게 축하할 때 또 쐬주만한게 없다. (아 벌써 취한다.)
또한 소주는 한국의 수많은 음식들과 아주 잘 어울리는 술이다. 어떤 것이랑 먹어도 다 잘 맞는다.(모든 음식에 소주를 붙이면 좋은 조합이 된다. 치쏘 삼쏘 곱쏘... 킹갓소주... 쏘멘...) 한국음식과의 마리아주(marriage), 음식과 술의 궁합이 매우 좋다.
4. 하지만 평생 간의 술인생을 떠나기 시작하는 우리 세대에게 소주는 보편적으로 외면받기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술도 점점 외면받고 있다. 술은 부분적으로 커피와 다양한 것들로 대체되어가고 있다. 식사 이후 2차 장소가 카페와 호프 중 택일 되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소주를 마시러 2차를 갔던 마지막이 언제인지는 잘 기억나지도 않는다.)
소주에서 사람들의 술역사가 끝나버리는 것은 너무나 아쉬운 일이다. 케이팝이 싫다고 아예 노래를 안 듣는 사람이 되는 건 안타까운 일 아닌가.(물론 소주는 케이팝이 아니다. 트로트 쪽에 좀 더 가깝다. 민족의 한과 흥...이랄까)
노래처럼 술은 만능이다. 피크닉의 노래처럼 일상에 하이라이트를 만들어주기도 하고, 매일 듣는 이어폰 속 노래처럼 잔잔히 일상을 채워주기도 한다. 프로포즈 같은 일생에 한번뿐인 이벤트에 일조하고, 괴롭기 그지없는 홀로인 시간도 꿋꿋히 함께한다. 물론 그에 걸맞는 맛과 향을 지닌채로 말이다.
술은 맛있다. 매력적인 맛과 향이 있다.
5. 희석식 소주도 소주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지만, 그 외에도 매력덩어리인 친구들이 많이 있다. 많이 있는 정도가 아니다. 전 세계 각지에서 날아온 환상적인 친구들이 아주 많이 많이 있다. 우리나라 출신인 맛있는 술도 그득그득하다.
난 요새 메즈칼(Mezcal)이라는 술에 푹 빠져있다. 메즈칼은 데킬라의 상위 개념의 술이다. 용설란(Agave)이라는 식물로 만든 술인데 그중에서도 청용설란(Blue Agave)만을 이용해 데킬라 지역에서 만들어진 술을 데킬라라고 부른다.
메즈칼은 보통 용설란을 구워서 술로 만들기 때문에 술에서 불맛이 난다. (데킬라는 보통 용설란을 쪄서 만든다.) 소위 탄내가 술에서 나는 데, 그게 그렇게 매력적일 수가 없다. 상상이 안가겠지만 진짜 탄내가 난다. 이 메즈칼 한잔에 과카몰리를 잔뜩 바른 타코를 딱 물면 세상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눈을 내려감고 고개를 흔들며 외쳐보자 페르뻭도... Perfecto..!)
위 사진 속 술은 우리나라의 전통 탁주인 이화주인데, ‘떠먹는 막걸리’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이 친구도 아주 매력이 철철 넘친다. 경리단길 안씨네 막걸리에서 처음 접했었는데, 우와! 하며 먹었던 기억이 난다.
술이 잼병 같은 자그마한 병에 담겨져 있는데, 열어서 플레인 요거트를 먹듯이 나무수저로 술을 떠!먹으면 된다. 한입 떠먹으면 요거트 같다가도 잔잔한 막걸리맛이 싹 올라온다. (역시 선조님들은 배운 분들이다.)
이처럼 술의 세계는 전 세계 오디션을 거쳐 슈퍼스타가 된 친구들이 만든 베스트 앨범이다. 게다가 전 세계의 수많은 바텐더들이 다양한 술들을 자기만의 스타일로 리믹스해서 칵테일을 내놓고 있다.
6. 술은 맛있다. 단순히 맛이 있다는 게 아니다. 다양하고 복잡한 맛과 향이 있다. 아주 친절하고 상냥하게 향긋한 꽃향기를 뿜어낼때도 있고, 독한 알코올 기운 속에 숨어있다가 깊은 곳까지 쫓아오는 사람에게만 츤츤히 향을 내어 놓는 경우도 있다. 메즈칼처럼 불맛을 내기도 하고, 맵기도 하고, 짜기도 하며, 달고 시기도 하다. 때론 어디에서도 먹어본 적이 없어서 설명할 수 없는 맛을 내기도 한다.
물론 그중엔 희석식 소주처럼 내게 안맞는 술이, 맛과 향이 있을 수 있다. 내겐 진(Gin)이 그런 술이다. 칵테일을 처음 접했을 때 마셨던 칵테일이 드라이 마티니였다. 처음 마신 순간 ‘윽 독하고 짜고 맛없다.’ 라는 생각을 했었다. 아마도 마티니에 들어간 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란 순진한 인간은 칵테일은 다 이런가보다 생각을 했었다. 게다가 아는 칵테일이, 먹어본 칵테일이 그것뿐이었던지라 한동안 가는 바마다 줄곧 마티니 한잔만 마시고 나왔었다. 매번 꾹꾹 참아가며 그 마티니들을 마셨던 기억이 난다.
혹시 내가 그때 이후 칵테일은 다 그런 것인줄 알고 칵테일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내가 수많은 바에서 만난 즐거운 잔들과 경험들도 없었을 것이고, 수없이 힘들었던 순간들을 위로해주었던 잔들도 없었을 것이다. 난 덜 즐거워지고 더 우울해졌을 것이다.
부디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술과 함께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위로받기를 바란다. 당신에게 잘 맞는 술을 찾아 그걸 마시면서 풍요로워지기를 빈다. 당신에게 잘 맞는, ‘맛’이 있는 술과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