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지 못하는 마음

by 와초 Wacho


식탁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켠다. 화면이 켜지고 커서가 깜빡이기 시작하면, 마음도 따라 잔잔해진다. 문장을 하나씩 써 내려가는 동안만큼은 나도 잠시 안정을 되찾는다. 글 한 편을 완성한 날이면, 그 하루만큼은 나름 만족스럽다.


그런데 글을 아예 쓰지 않는 하루, 책이라도 손에 들지 않은 채 흘려보낸 하루가 지나면 마음은 금세 무거워진다. 남은 시간은 자책으로 채워진다.


‘재’ 휴직에 돌입한 지 두 달 반 가량 되었다. 갑상선암 치료 후 꽤나 긴 휴직을 하였으나, 몸이 회복되기도 전에 복직을 서둘렀던 걸까. 복직 3개월 만에 몸은 시끄럽게 경고음을 내기 시작했다. 갑자기 퉁퉁 붓기 시작해 열흘 만에 3kg가 늘었다. 아침이면 몸이 납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매일 잠에서 깨는 게 두려웠다. 게다가 몸에 전기가 뚝 끊긴 듯, 일하다가도 갑자기 픽! 하고 쓰러질 것 같은 순간이 늘어났다.


아침에 일어나면 슈퍼 워킹맘의 하루가 펼쳐졌다. 아이와 아침 먹고 준비해서 등원시키고, 회사 출근해서 일하다가 3시 30분쯤이 되면 어린이집에 가서 아이를 픽업하고 집에 와서 같이 놀이했다. 저녁때가 되면 안 먹겠다는 아이와 실랑이하며 밥을 먹이고, 씻기고, 함께 누웠다. 아이가 잠들고 방문을 나가면 할 일이 아직 산더미처럼 남아있었지만, 아이와 눕는 그 시간은 정말 달콤했다. 비로소 내가 쉴 수 있는, 그날 하루 첫 ‘정지’의 시간이었으므로.


그렇게 짧은 기간 건강한 일반인이라도 되는 줄 착각하며 살았지만, 어느 순간 몸이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이건 아니잖아! 나 좀 쉬자!” 라며 몸이 소리치고 있었다.


정말 고맙게도 직원들과 가족들 모두 한 목소리로 휴직을 권했고, 나는 다시 ‘회복’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다시 가진 휴식의 첫날, 나는 몸에게 정말로 쉬는 시간을 주겠노라 굳게 다짐했다.


‘이번엔 기필코 철저하게 쉬고 말리라!’


스스로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고 있어서였다.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며 열심히 살라고 부추기는 인간. 무언가를 하고 있지 않으면 잘못 살고 있다는 자책에 빠져, 불안함과 초조함에 시달리는 인간.

하지만 다짐이 무색하게, 작심 3일 만에 나는 워킹맘 대신 나에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다. 그동안 너무 하고 싶어도 시간에 쫓겨 못했던 읽기와 쓰기. 나는 이제부터 독서가와 에세이스트로 스스로를 규정했다.


아이를 등원시키고 나면, 날마다 마음 양 편에서 두 가지 욕망이 꿈틀댔다.


‘쉬고 싶어. 누워서 드라마 보고 싶어.’

‘안돼. 책 읽고 공부해. 글을 써야지. 이런 황금 같은 시간을 넷플릭스에 넘겨줄 순 없잖아!’


그럴 땐 노자가 속삭인다. “하지 않음을 행하라.”

머리로는 안다. 무위(無爲)의 미덕, 집착을 내려놓고 흐름에 맡기는 삶.


그러다 이번엔 조르바가 등장한다. 해변에서 맨발로 춤을 추며 말한다.

“하고 싶은 대로 살아! 오늘 하루는 다시 오지 않아!”


<도덕경>은 내 인생 책이다. 여러 번 곱씹어 읽으며 삶의 지침처럼 새겨왔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비문학 책만 편식하는 나를 뜨겁게 흔든 소설이었다.

이상하다. 그 두 책을 가장 좋아하는 나는, 정작 이들과 가장 먼 방식으로 살고 있다. 나는 항상 어딘가로 달려가고 멈추는 법을 모른다. 어쩌면, 그래서 더 이들에게 끌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게 나에게 가장 깊이 박힌 욕망일지도… 그런데 그 욕망조차, 현실 앞에서는 늘 조용히 접힌다.


오늘 낮에도 그랬다.

넷플릭스를 틀어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생활>을 보기 시작했고, 너무 재밌어서 멈출 수 없었다. 마음은 내내 불편했지만, 몸은 모처럼 편히 쉬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 또 다른 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넷플릭스 볼 거면 차라리 영화라도 봐. 황금종려상 받은 그거 있잖아. 메모라도 좀 남겨. 이 시간 그냥 날리는 거야? 뭐라도 남는 게 있어야 하지 않아?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한심해.’


나는 왜 나를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사람’으로 규정하려 할까? 그저 ‘쉼을 하는 사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걸까. 왜 나는 늘 무언가를 ‘생산’해야만 살아있는 것처럼 느끼는 걸까.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시간은 정말로 한심하고 헛된 시간일 뿐일까. 나는 언제부터, 왜 그런 믿음을 품게 되었을까. 그렇게 나를 끊임없이 몰아세우는 삶을 당연하게 여기게 된 걸까.


당신도 그러지 않나?


아마도 많은 이들이, 나와 비슷한 질문 앞에 서 있을 것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할까. 왜 노력하는 하루, 성과를 낸 하루만이 박수받을 수 있다고 믿는 걸까?


생각해 보면, 이 시대에 ‘쉬는 나’로 자신을 규정한다는 건 참 어렵다. 나 역시 그렇다.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온 나에게, ‘노력’과 ‘생산’은 나를 지켜주는 일종의 보호막 같은 것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불안하고, 멈춰 서면 뒤처질 것만 같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무가치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이 감각. ‘노력’과 ‘생산’은 참 싫은 이 감각을 견디게 해주는 필요악의 존재였다.


그것은 단순히 내 성격이나 습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태어나 숨 쉬어 살아온 시대의 신화일지도 모르겠다. 너무 공기 같아서, 내가 아무리 노자의 ‘도가도비상도(道可道, 非常道)’를 외쳐도, 조르바의 춤을 부러워해도, 그렇게 살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이 시대의 사람이고, 이 시대의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몸이니까.


나는 아마도 ‘생산성의 압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피곤해도, 글을 쓰는 이 순간만큼은 마음이 편안하다. 내가 스스로 규정한 역할 위에서 제 할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몸은 아무리 편안해도, ‘쉬는 나’를 내가 인정하지 못하니 그 시간은 불편하다. ‘나’는 다름 아닌 이 시대의 합리성과 효율이라는 기준에 기대어 만들어진 존재이므로. 그러니 쉬고 있어도, 나를 지켜보는 또 다른 내가 계속 묻는다.


“그래서 지금 이건 뭐에 도움이 되는데?”


나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무언가를 해야만 하겠지. ‘휴식’도 무언가를 하는 거라고 끊임없이 되뇌어도 결코 머릿속에 입력되지 않을 것이다. ‘휴식’ = ‘멈춤’이라는 등식이 이미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그냥, 내가 왜 그런지 조금 더 알게 된 하루였다. 그거면 충분하다.

그러니 나 이제 좀 쉬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