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은 그것을 초과하는 흐름과 함께 진행된다. 가령 수업을 들으러 간 교실에서 친구를 사귀고, 공부하러 간 세미나는 술자리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다른 사건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삶은 복잡하다. 그것은 늘 우리가 염두에 두었던 것을 넘쳐흐른다. 그러나 그 초과하는 흐름, 즉 흘러넘치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중요한 삶활동이다. 친구는 수업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하다. 이렇게 본래의 의도를 넘어서는 흐름은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삶은 분열하고 다양하게 증식한다. 즉 생동한다.
그러나 최근 코로나19 국면에서 줌(Zoom)을 필두로 한 오프라인의 온라인으로의 대체는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삶의 분열증식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줌의 문제는 강의나 토론, 회의 등을 하기에 기능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이 없다는 데서 온다. 그 인터페이스는 부족함이 없기에 널리 퍼질 수 있었고 집에 고립된 이들을 훌륭하게 연결했다. 하지만 그 연결은 기능적이다. 줌은 강의를 강의로, 토론을 토론으로, 회의를 회의로만 한정한다. TV 속 연예인처럼 모니터로 마주하다가 호스트가 종료 버튼을 누르는 순간 사라지는 얼굴들 사이에서 예측하기 어려운 마주침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삶은 분열을 멈추고 기능적인 고리로 단순하게 배치된다.
줌이 큰 역할을 맡았던 대학이라는 공간을 생각해보자. 본래 학생은 수업을 듣는 것만이 아니라 대학이라는 공동체에 참가한다. 학생은 교수의 말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공부하는 모임을 조직할 수도 있다. 또 다양한 행사를 열고 모임을 만들고 여러 활동을 함께 조직하면서 기존의 개별화하는 관계를 떠나 집합적인 되기의 과정에 가담한다. 그러니까 대학은 강의가 열려 누군가는 말을 하고 누군가는 듣는 것에 그치는 활동만이 아니라 그것을 초과하는 흐름들로 채워진다. 난 지금 소위 낭만적인 캠퍼스 생활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대학이 기능적인 활동을 넘어 다양한 가능성을 품은 공통공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학의 줌화는 그러한 초과하는 흐름을 걸러내고 그곳의 활동을 규정된 기능으로 축약한다. 물론 그러한 축약은 줌으로만 인한 것은 아니다. 대학의 공동체적 공간으로서의 성격은 기업과 경쟁을 사회 조직의 원리로 삼는 신자유주의의 바람 속에서 이전부터 이미 크게 위축되었다. 대학의 줌화는 코로나바이러스가 퍼지기 전부터 사회적으로 진행 중이었다.
어떤 활동의 줌화, 다시 말해 기능화란 분열과 증식이 멈추고 사물화되는 과정을 말한다. 기능화가 퍼져갈 때 삶은 정해진 목적지로만 달린다. 그 길은 주어져 있다. 반듯하게 계획된 도시를 보라. 현대의 삶을 고안하는 도시계획은 공간을 기능적으로 구분한다. 그 계획에 따라 이곳에는 아파트 단지가, 그 옆에는 공원이, 그 옆에는 쇼핑몰이, 그 옆에는 병원이, 그 옆에는 지하철역이 들어선다. 모든 곳은 기능에 따라 정의되어 있다. 그러한 기능적 구획으로서 도시계획의 역할은 미래를 현재의 기능 안에 가두어 예측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파트에서는 잠을 자고, 공원에서는 산책하고, 쇼핑몰에서는 쇼핑하고, 병원에서는 진료받고, 지하철역에서는 지하철을 타고 직장으로 간다. 그것을 초과하는 흐름은 예측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늘 위험을, 즉 질서에 대한 위협을 내포한다. 따라서 초과분은 제거되어야 하며 도시설계와 건축술, 각각의 공간을 둘러싼 치안은 그것을 담보하기 위한 방식으로 짜여 있다. 도시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간판에 다 쓰여 있다. 삶은 그 선택지 중 하나를 소비하는 것으로 채워진다. 그 바깥으로 나가기는 쉽지 않을뿐더러 범죄화되기도 한다. 삶은 고정된다. 생동을 멈추고 권태에 빠진다.
이렇게 도시의 미래가 예측가능한 것이 될 때 도시의 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 자본은 예측가능함을 선호한다. 자본은 노동계급을 노동력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환경을 원한다. 이때 발전할 수 있는 경제란 무엇인가? 우리는 코로나19 시기에 많은 정치가와 기업가들로부터 경제를 다시 일으켜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지적하듯이 우리가 경제라는 말로 우리를 살아 있게 하고 먹을 것을 주고 옷을 입히고 거처를 제공하는 활동을 뜻한다면 그것은 멈춘 적이 없다. 그렇다면, 다시 말해 경제가 필수적인 재화와 서비스의 공급이 아니라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레이버의 답은, “경제란 인간의 필요를 공급하기 위한 메커니즘이 아니라, 대체로 바로 그 여분이 꼭대기에 추가되는 메커니즘”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를 고정하는, 그래서 경제 발전의 기초를 닦는 도시 계획은 미래를 추측(speculative)하면서 미래를 투기(speculative)한다.
정치가들이 늘 경제 발전을 약속할 때,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건 우리의 삶의 안녕이 아니라 도시의 부를 꼭대기로 — 많은 경우 그들 자신에게로 — 이전하는 환경의 구축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삶은 발전하기보다 — 삶이 발전한다는 건 무슨 뜻일까? — 위협받는다. 우리는 쫓겨난다. 그러나 그것은 개발로 인한 세련된 풍경과 평균적인 수치의 개선에 가려져 보이지 않고 무시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라는 건 경제의 발전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 발전하지 말고 경제라는 말도 버리자. 발전은 지긋지긋하고 경제는 통념과 달리 우리 삶과 무관하거나 우리 삶을 다루기에는 너무 협소한 말이다. 경제도 발전도 경제 발전도 다 버리자.
경제 발전을 목표로 하는 계획, 도시의 마스터 플랜은 예측가능한 공간 설계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삶을 일차원적으로 만들려 한다. 도시의 풍경은 지루하고 삶은 권태로 가득 찬다. 그것을 멈춰야 우리는 생동한다. 그런데 우리는 계획이 멈추면 생동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멈추기 위해 움직이기도 한다. 다시 말해 생동한다. 사실 우리에게 더 흔한 생동은 후자인 것 같다. 여기서 나타나는 역설은 우리를 권태로 이끄는 것이 우리를 생동하도록 만들기도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권태를 막기 위해 생동한다. 따라서 계획이 짠 권태의 그물이 도시 전역에 던져질 때도 그것은 언제나 해어진 그물이다. 우리는 그 사이사이에서 생동하며 분출한다. 요컨대 (위험할지도 모르는) 생동을 막기 위한 계획과 권태가 있다면 다시 그것을 막기 위한 생동이 있다. 이러한 권태와 생동의 변증법은 도시의 풍경과 우리의 삶을 결정한다. 그러나 생동은 일시적이고 권태는 영속적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결국 그 변증법은 생동을 권태에 용해하는 과정이다. 그러니 그 변증법에서 벗어나는 게 중요하다. 틈새에서 생동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산발적으로만 분출하는 힘들이 흩어져 권태로 빠져들지 않도록 생동의 짜임을 넓혀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생동을 지속하는 터전을 닦는 일이다. 우리는 그동안 생동하는 활동 자체에만 주목해왔다. 그러나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활동을 지속시킬 수 있는 기반을 구성하는 것이다. 우리를 서로 연결할 뿐 아니라 우리의 생동력을 계속 재생산할 수 있는 공통의 기반을 다져야 한다. 도시에서 그 공통의 기반을, 커먼즈를 만드는 일은 가능한가?
그동안 도시에서 (온라인상의 협력만이 아니라) 우리의 몸을 재생산할 수 있는 기반으로서의 커먼즈는 충분히 이야기되지 않고 실험되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생동이 일시적인 것에 그쳤던 이유다. 우리가 계속 생동하기 위해, 비물질적인 것들이 우리를 에워싸는 이 시기에 우리는 오히려 커먼즈의 가장 전통적인 형태에 눈을 돌려야 할지도 모른다. 이제 도시의 땅에서 공통의 숲을 이룰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