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뭘.. 쓰려고 했더라?" 잊지 않으려면 이것만은 꼭
[기획안의 역할]
책, 강의, 동영상, 콘텐츠, 프로덕트, 행사 ...
직종 불문 어떤 일을 시작하든 빼놓을 수 없는 문서 한 장이 있습니다.
쓰는 데도 시간이 한참 걸릴 뿐만 아니라 검토받고 컨펌받고 한참 이 사람 저 사람 손에 옮겨 다니다 돌아올 때쯤 너덜너덜해지기 일쑤인 바로 그 기획안입니다.
주니어 땐 이딴 걸 쓸 시간에 빨리 저자 섭외하고 책 쓰게 했으면 세 권은 더 냈겠다 싶었지만 기획안은 갓 태어나 사람 저 사람의 손을 타는 그 순간이 아니라 생각보다 나중에 그 효력을 발휘합니다. 바로 '집필하는 모든 순간' 그리고 '책을 낸 후에'입니다.
특히 전문서 같은 경우 해당 분야의 전문가일수록 깊이 빠지는 '지식의 저주'라는 고질병에 노출되기 쉽습니다. '이 정도는 알아야 되지 않나?'하는 마음에 쓰다 보면 어라 모먼트를 마주하게 됩니다. 너무 발이 깊게 빠지고 어깨가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하기 때문이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책은 산 중턱을 넘기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지금까지 쓴 것도 왠지 아까워지기 시작해 버리지도 못하는 기회 비용에 허덕이면서 '이게 맞나?'라는 감옥에 스스로 갇히기 시작합니다.
또 다른 케이스도 있습니다. 쓰다 보니 원래 쓰려고 했던 것보다 이게 좋아 보이고, 서점에 시장 조사를 하러 갔더니 요즘 이런 것도 유행이라 그러고, 사람들 반응 보니 이런 내용도 넣어야 할 것 같고 정신 차리면 마라탕이 되어 있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바로 이럴 때 혼자 끙끙 앓으시지 말고 함께 기획한 기획 편집자를 찾아 주세요.
이 순간이 계약 전 담당자와 열심히 머리를 맞대고 썼던 기획안이 빛을 발할 때거든요.
[기획안이 필요한 순간]
출간 전 기획안을 쓰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① 출판사에 투고를 할 때
② 출판사와 계약 전후
투고할 때 기획안을 찰떡 같이 쓰셔도 계약 전후에 담당자와 다시 한번 시장을 구체화하고 기획안을 다듬는 과정을 거칩니다. 즉, 기획안은 최소 두 번은 마주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투고 기획안에 어차피 뒤집어질 걸 감안해서 대충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기획안의 일부 항목은 출판 시장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하면 쓰기 난감한 영역도 있습니다만,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어 주세요.
그러면 안 됩니다.
종종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책이라 여기고 냅다 좋은 건 다 넣거나, 쓰다 보면 뭐라도 되겠지 라는 마음으로 이하 생략을 갈겨버리시는 분들이 있으십니다.
이는 앞서 언급한 '기획안을 쓰는 순간' 두 가지 중 첫 번째 단계인 '투고'에서는 시작을 못하게 된다는 참사를 불러옵니다. 본인이 글을 쓰려는 해당 주제에 대해 전문가인 건 약력으로도 충분히 어필이 되지만, 정말 해당 주제를 잘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인지는 기획안에서 드러나기 때문이죠.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기획 편집자는 해당 원고에서 가능성을 보지 않습니다.
두 번째 단계인 '계약 전후'에서는 두 가지 양상으로 흘러갑니다. 기획안 도르마무 굴레에 갇히거나, 어떻게 대충 계약하고 집필을 시작했다 하더라도 탈고라는 기나 긴 여정까지 중심 축 없이 나부낍니다. 우선 핵심 기둥이 없는 기획안을 그냥 넘겼다는 데에서 기획 편집자도 맴매를 맞아야 되기 때문에 아마 저자와 담당자 모두 한없이 나부끼게 될 것입니다.
(종종 기획을 이렇게 하고도 책이 나오고 잘 팔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있다는 거지 많진 않으니 '그게 나'일 거라고는 여기지 않으시는 걸 권장드립니다)
[기획서 톺아보기]
혀가 길었습니다. 기획서 바로 살펴보겠습니다.
다음 기획서는 실제 한빛미디어, 한빛비즈 등 여러 분야에서 도서를 출간하고 있는 한빛출판네트워크에서 누구나 다운로드받을 수 있는 기획안 양식입니다. 바로 여기서 다운로드받을 수 있죠. [링크]
이 기획안은 한빛출판네트워크뿐만 아니라 어떤 출판사에서든 비슷한 양식을 받고 있으니 이 기획안을 기반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이름, 휴대전화, 이메일, 저자 소개 같은 기본 인적 사항은 반드시 작성해 주시고 그 아래부터 하나씩 뜯어 살펴보겠습니다. 제목, 기획의도, 컨셉, 대상 독자 등 여러 항목이 있는데 이 중 가장 중요한 게 뭔지 궁금하시겠죠. 정답은 닝겐 바이 닝겐입니다.
기획 회의 테이블은 이 기획안에서 안 되는 점을 눈에 불을 켜고 찾은 다음, 가능성이 보이는 것을 잡아 이걸 되게 바꾸는 자리입니다. 기획안을 테이블에 펼쳐 두고 여러 명의 기획 편집자가 의견을 나누다 보면 누군가는 기획안의 오탈자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누군가는 대상 독자가 불분명하다, 누군가는 목차에 핵심이 없다, 누군가는 이메일이 야후라 안 된다, 누군가는 경쟁도서가 없다는 걸 보니 시장 파악이 덜 됐다 등등 여러 의견을 냅니다.
즉, 가장 중요한 건 본인이 쓰고자 하는 책을 전체적으로 얼마나 잘 파악하고 있느냐입니다.
각 요소에서 기획자가 보고자 하는 것들을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중요도의 ★ 개수는 철저히 개인적인 기준이므로 참고만 하세요.)
기획 의도(중요도 ★★★)
이 책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공간입니다. 이 책을 왜 집필하겠다고 마음먹었는지, 이 책을 집필함으로써 어떤 목적을 달성하고 싶은지 작성합니다.
예. 인세 많이 받아서 포르셰 사겠다 (X)
예. 주니어 개발자들의 역량을 증진시키겠다 (O)
콘셉트(중요도 ★★)
이 책의 특징을 요약해서 작성해 주세요. 독자들이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강점을 위주로 작성하면 더욱 좋습니다.
예. 대단한 건 뭐 없고요. 많이 팔아서 돈 많은 백수가 되고 싶어요. (X)
예. 실습 예제 코드를 모두 제공함으로써 책과 동일한 결과를 낼 수 있다. (O)
저자 소개(중요도 ★★)
말 그대로 자신을 소개하는 공간입니다. 단, 어떤 학교를 나왔고 어떤 회사를 다녔다는 정보도 좋지만 이 책을 쓸 수 있을 만한 어떤 전문성 또는 서사가 있다면 그런 것들을 담아 주세요. 물론 서사만 쓰시면 곤란합니다.
예. 커피를 좋아하는 늦깎이 독학러입니당 ^^ (X)
예. 컴퓨터공학과를 전공했고, 주니어 개발자를 위한 스터디를 운영했다. (O)
대상 독자(중요도 ★★★★★★)
기획안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자 추후 책을 집필하는 내내 중심 축 역할을 할 '대상 독자'를 작성하는 공간입니다. 내 책을 읽을 독자가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 책의 난이도, 방향성이 달라지니 구체적으로 작성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 20대 남성. 롤보다 롤토체스를 선호함 (X)
예. 데이터분석가를 지망하는 컴퓨터전공학과 학부생, 이론도 빠삭하고 자격증도 취득했지만 실무 경험은 없음(O)
구성안/목차(중요도 ★★★★★★)
대상 독자와 더불어 기획안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이후 집필하는 동안 '내가 뭘.. 쓰려고 했더라..?' 싶을 때 반드시 참고하게 됩니다. 목차 작성 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상 독자에게 맞는 난이도와 흐름'며,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위계'입니다(목차의 위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또 다른 글 한 편으로 다루겠습니다). 목차 작성이 낯설다면 아래 '경쟁 도서'의 목차를 참고하는 것이 좋습니다.
구성요소/내용(중요도 ★)
목차를 기반으로 대략 어떤 내용을 다룰 것인지 목차를 좀 더 구체화하는 공간입니다. 중요도가 낮은 이유는 이 영역은 집필 단계에서 얼마든지 디벨롭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집중하는 것보다 목차를 꼼꼼히 작성하는 데 리소스 들이는 것을 권장하는 편입니다.
경쟁도서(중요도 ★★★★)
'경쟁도서'라고 적혀 있지만 종종 도서 시장에 없는 주제를 다룰 때도 있습니다. 이 경우 도서뿐만 아니라 대체 콘텐츠(온오프라인 강의, 학원 등)와 달리 어떤 강점을 가지고 있는지도 함께 써주시면 좋습니다.
예상사양/예상 판매부수(중요도 ★)
책의 형태, 예상되는 판매부수를 작성하는 공간입니다만 출판 분야에 빠삭하지 않으면 쓰기 가장 곤란한 영역입니다. '예상 사양'은 경쟁 도서와 작성하신 목차를 참고해 어느 정도의 크기와 분량이 나올지 가늠할 수 있고, '예상 판매부수'는 yes24, 교보문고의 '판매지수' 영역을 참고하면 이 분야에서 해당 주제의 도서는 어느 정도로 판매가 되는지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참고로 출판사에서는 이런 경로로 책정한 예상 판매 부수에 따라 초판 인쇄 부수가 결정됩니다. 대부분 1천부에서 2천부, 판매량이 약간 기대될 경우 3천부, 베스트셀러가 담보된 저자나 주제일 경우 그 이상을 초판 부수로 잡습니다.
출판사 역시 저자가 출판 전문가가 아니라는 것을 감안하므로 완벽하게 작성하시느라 불필요한 시간을 많이 낭비하시지 않는 걸 권장드립니다.
예. 예상사양: <베스트셀러>처럼, 판매부수: 10만부 삽가능 ^^ (X)
논의사항/요구사항(중요도 ★)
책에 대해 출판사와 논의가 필요하거나 요구하고자 하는 내용을 작성하는 공간입니다. 예를 들어 책의 특성상 올해 반드시 출간되어야 한다거나, 마케팅으로 어떤 활동을 해주었으면 한다거나, 감수가 필요하다거나 등등 출판사와 논의가 필요한 모든 내용을 자유롭게 작성해 주세요. 없다면 비워 주셔도 무방합니다.
이렇게 기획안 작성이 끝났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쓰다 보면 어라 모먼트가 또 발동하게 될 겁니다. 이거 좀 겹치는데? 또는 이거 먼저 써야 이걸 쓰겠는데? 싶은 부분들이 있을 겁니다. 맞습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뭘 먼저 쓰든 상관은 없지만 먼저 쓰면 쉽게 쓸 만한 게 분명히 있습니다. 바로 '대상 독자'입니다. 대상 독자를 쓰면 자연스럽게 '컨셉'과 '경쟁도서'가 잡힙니다. '경쟁도서'가 잡히면 '컨셉'이 잡힙니다. 즉, 기획안을 반드시 순서대로 쓸 필요가 없으니 뼈대가 되는 것들을 먼저 작성하면서 뻗어나가는 형태로 작성하면 보다 쉽게, 탄탄하게 기획안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투고 거절 시 권고 사항]
출판사에 투고한 원고를 거절당하셨나요? 걱정하지 마세요. 조앤 롤링은 12번이나 거절당하고 훌륭하게 <해리포터>를 출간해냈으니까요(?). 투고를 거절당했다고 독립 출판해야겠다고 바로 유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기획 편집자가 투고를 살펴보는 목적은 '좋은 책을 만들 저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즉, 좋은 책을 만들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있다면 원고는 거절해도 사람은 거절하지 않습니다. 왜 이 원고가 거절당했는지 질문하세요. 또는 커피 한 잔할 시간을 내달라고 요청을 하셔도 좋습니다. 직접 기획 편집자에게 미팅을 요청해도 좋고, 비대면 미팅을 요청해도 좋습니다.
미팅하면서 집필하시려는 분야에 대한 도서 시장에 대해 질문하셔도 좋고, 기획안을 출간이 되게 하려면 어떤 부분을 수정하면 좋을지 질문하셔도 좋습니다. 분명 기획 편집자들은 열의에 가득 차서 여러분의 원고가 독자들을 만날 수 있는 방향을 찾으려 할 테니까요.
[자주 하는 질문]
Q. 기획안에 쓴 목차는 이제 못 바꾸는 건가요?
A. 네 이제 못 바꿉니다. 농담입니다. 언제든 바꿀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급적 나중에 바꾸면 수수료 든다는 마인드로 초반에 목차를 꼼꼼히 쓰시는 걸 권장드립니다. 목차는 말 그대로 책의 '뼈대' 역할을 하기 때문에 초반 기획을 할 때 그 방향에 맞춰 쓰셨을 겁니다. 추후 시장의 흐름, 트렌드, 독자들의 니즈 파악 등에 따라 변동이 있을 수는 있지만 바꿨을 때 반드시 기획한 독자들에게 이로운 방향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거 바꾸면 돈 내야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충분히 숙고하신 후 변경하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참고로 저는 IT 분야에서 기획 편집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언제든 여러분의 기획안이 잘 작성되었는지 궁금하다면 언제든 커피챗 문의를 주세요. 꼭 저와 함께하지 않으셔도 제가 드릴 수 있는 모든 의견을 챙겨드리겠습니다. 돈 안 받아요.
문의: leeheeyeou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