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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겁나남편 Jan 05. 2020

리투아니아 십자가의 언덕으로

리가를 떠나 리투아니아로

라트비아에서의 아쉬운 3박 4일을 마치고 리투아니아로 이동한다. 리투아니아는 발트 3국 중 유일하게 가톨릭에 대한 믿음이 매우 강한 나라이다. 소련과 러시아의 억압 속에서도 종교의 믿음을 지켜낸 흔적이 나라 곳곳에 퍼져있는데, 그런 곳 중 하나인 '십자가의 언덕(Hill of cross)'을 가보기로 했다.




십자가의 언덕 Hill of Crosses


십자가의 언덕은 리투아니아 인들이 받았던 종교 박해에 대한 비폭력적 저항의 상징이다. 언제부턴지는 확실치 않지만 오래전부터 이 언덕에 많은 십자가들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가톨릭을 탄압하려고 소련이 이 언덕의 십자가를 치우고 치워도, 또다시 십자가를 세우기를 반복하며 그들의 종교적 자유를 주장했다고 한다. 199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해 이곳을 희망, 평화, 사랑과 헌신의 장소로 선언하면서 가톨릭인들에게는 유명한 순례지가 되었다. 


발트 3국 여행을 준비하면서 이 언덕에 대해 알게 되었고, 집에 걸어두던 십자가를 이 언덕에 세워놓기로 결심했다. 한국에서 분홍색 보자기로 곱게 싸서 가져온 십자가를 이제 배낭에서 꺼내야 할 때가 되었다.




리가에서 샤울랴이로 이동 Riga to Siauliai


샤울랴이행 버스

십자가의 언덕을 가려면 우선 샤울랴이라는 작은 마을로 가야 한다. 리가 터미널에서 샤울랴이까지 버스가 운행 중이고, 온라인과 터미널에서 티켓 구매가 가능하다. 우리가 예약한 오전 9시 버스는 출발 5분쯤 앞두고 플랫폼에 도착했다. 국제선이라 하기에 작은 밴 버스지만 자리는 꽤 아늑하고 편안했다.


십자가의 언덕 행 버스 스케줄

리가를 출발한 버스는 2시간 반쯤 달려 국경을 넘어 리투아니아 샤울랴이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버스 티켓 창구에서 십자가의 언덕행 버스 스케줄을 문의했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Hill of Crosses라는 말에 직원은 미소 띤 얼굴로 작은 종이의 스케줄표를 내어준다. 대략 1시간에 한대 꼴로 버스가 다니는 듯했다. 버스 시간을 확인했으니 빌뉴스행 기차표를 알아보러 기차역으로 가보자. 오늘 십자가의 언덕을 구경한 뒤 기차를 타고 빌뉴스까지 내려갈 계획이다.


샤울랴이 기차역은 버스터미널에서 도보로 약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십자가의 언덕을 구경하기에 5시간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 오후 5시 25분 기차 티켓을 구매했다. 마침 기차역에 짐 보관소가 있어 배낭에서 십자가를 꺼낸 뒤 보관소에 맡겼다.  


기차역 앞 가톨릭 성당

가벼워진 몸으로 십자가의 언덕 행 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오는 길에 보지 못했던 멋진 성당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구경할 겸 성당으로 가보니 마침 주일 미사가 진행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주일이구나. 우리는 자연스럽게 미사에 참가했다. 언어는 알아들을 수 없지만 가톨릭 미사는 전 세계에서 공통된 양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다. 


주변 사람들과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미사가 끝나기 무섭게 우린 다시 터미널로 향했다. 시간을 보니 조금 서두르면 1시 10분 버스를 탈 수 있을 것 같다. 버스를 놓치면 택시를 타야 하는데 가격 차이는 10배 이상이다. 조금이라도 돈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 부인을 뒤로한 채 정신없이 터미널로 뛰었다. 


터미널에 도착했을 무렵 다행히 버스는 아직 출발하지 않았다. 막 떠나려는 버스를 붙잡고 기사님에게 부인이 달려오는 곳을 가리켰다. 친절한 기사님은 부인이 버스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주셨다. 나이스! 자 이제 십자가의 언덕으로 가자!





십자가의 언덕 도착 Arriving at the Hill


십자가 언덕으로 가는 길

버스는 약 15분 정도 달려 어느 갈림길 정류장에 내려주었다. 십자가의 언덕으로 가려면 버스에서 내려 가로수가 뻗어있는 길을 따라가야 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나치는 차들에 히치하이킹을 했어야 했는데 그때는 미처 생각을 못했다. 그렇게 20분 정도 걸어가니 드디어 저 멀리 순례객들이 보인다. 



십자가의 언덕 입구

입구에 들어서면 기념품 가게와 인포메이션 센터가 나온다. 기념품 가게에서는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십자가를 판매하고 있다. 미처 십자가를 가져오지 못한 사람들은 이곳에서 십자가를 구매해 언덕으로 향한다. 입구 한쪽 벽에는 순례지를 뜻하는 파란 바탕의 노란 조개 문양이 걸려있다.


인포메이션 센터를 지나쳐 100미터쯤 걷다 보면 드디어 십자가의 언덕 앞에 도착할 수 있다. 먼 곳에서는 별 의미 없는 작은 언덕으로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엄청나게 많은 십자가의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정말 십자가의 언덕을 마주한다. 짓궂은 날씨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기도를 드리고 있다.


십자가의 언덕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십자가를 놓아두고 갔는지 도저히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십자가들이 보였다. 눈높이뿐 아니라 길을 제외한 모든 땅에도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십자가들이 세워져 있었다. 십자가 사이로 나있는 길을 따라 언덕에 오르면 그 뒤편으로도 많은 십자가들을 볼 수 있다.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성가와 기도 소리를 들으니 어느 거대한 성당보다도 더 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십자가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간절한 기도와 사연을 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괜히 마음이 무거워졌다.



한국에서 가져온 우리 십자가

우리도 한국에서부터 준비해온 십자가를 꺼내어 본다. 고이고이 잘 싸온 우리의 십자가. 결혼 한 뒤 늘 우리 집을 지켰던 십자가 뒷면에 오늘 날짜와 우리 이름을 기록해둔다.


우리 십자가를 놓아둘 곳을 찾다 예수님 조각상 근처 자리를 모색해본다. 마침 예수님 조각상 뒤쪽에 비어있는 못을 찾아 우리의 십자가를 걸어둘 수 있었다. 건강하고 안전한 여행이 되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다시 오는 그날까지 잘 있어주기를 바라면서 걸음을 옮긴다.


한국에서부터 준비해온 십자가를 걸어두고 오니 큰 숙제 하나 끝낸 듯한 그런 뿌듯한 마음이 든다.


부슬부슬 비 오는 거리를 걸어 버스 정류장에서 향했다. 이제 다시 샤울랴이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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