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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효진 Apr 30. 2024

나는 무슨 ‘글’을 쓰고 싶은가

나로 말미암은 글쓰기에 대하여

나는 왜 글을 써야 하는가?

사주를 보러 갈 때마다 듣는 소리가 있다. 무조건 글을 써라. 넌 글을 써야 된다. 처음엔 네, 하고 흘렸다. 그 다음엔 돈이 안 되는데요? 하고 받아쳤다. ’글로 대박이 날 거야‘라고 맞받아치는 말도 들었다. 그런데 올해 신년 운세를 보러간 곳에서 또 그랬다. 효진아, 너는 어딜 가든 글을 놓지 마라, 해외에 나가서 살든 한국에서 살든 써야 돼, 뭐라도 써야 돼. 그래서 내가 물었다.


- 왜요? (또 맞받아쳤다.)

- 네 조상 중에 글밖에 모르는 사람이 있어. 그 분이 너한테 붙어 있어.

- 아, 근데 돈이 안 되는데요? (같은 방식으로 또 맞받아쳤다.)

- 그게 돈이 된다니까. 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


또 같은 말을 들어버리다니. 이럴 거면 돈 주고 신년운세를 본 의미가 없는데, 싶으면서도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듯한 나의 운명에 체념하게 됐다. 그들 말마따나 대박이 날지 어떨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사주에 글이 콕 박혀 있으니 쓰라고 염불을 외주시는 게 아니겠는가. 더군다나 요즘의 나는 만만치 않은 ‘돈미새’다. 주요 수입원이 된다니 글이라니. 그것도 대박이 날 가능성이 있는 수입원이라면 나는 내가 가진 재능을 좀 더 뾰족하게 개발하고 싶어졌다.


나는 무슨 글을 쓰고 싶은가?

그간 써온 글들을 헤아려 본다. 규모에 상관없이 매체에 실려 본 글은 주로 기생하는 글이다. (기생하는 글이라는 표현이 조금 웃긴데, 이 표현이 아니면 내 글의 특징을 정의내리지 못 하겠다.) 콘텐츠가 없으면 안 되는 글. 본격적으로 글을 세상에 내보인 건 대학교 3학년을 앞두고다. 대학 매거진에 소속돼 영화 리뷰를 썼다. 단신으로 대중문화 아이템을 소개하는 글도 작성했었다. 특집 기사를 기획하여 몇 페이지에 달하는 대중문화 칼럼을 작성하기도 했으며, 운 좋게 기자님과 함께 신인 배우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었다. 그 시기와 겹치는 때에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공연 리뷰를 작성하기도 했다. 나는 그 시절을 나의 황금기라 부른다. 좋아하는 것을 한껏 향유하고 느낀 바를 글로 풀어내며 나의 취향과 개성을 발판으로 정체성을 세웠던 시기니까. 글쓰기 역량이 향상된 건 말할 것도 없다. 그때부터 영화관을, 소공연장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지금의 나는 그 시절의 나에게 기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몇년 후 음악 평론을 시작했다. 2년 정도 썼다. 짧은 시간 동안 스무 장 남짓의 앨범을 리뷰했다. 내가 쓰고자 하는 것은 분명했다. 이 앨범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그 메시지가 어떤 경위에서 도출될 수밖에 없었는가. 이 음악이 사회와 공명하는 지점이 있는가. 나는 이 지점을 제대로 쓰지 못해 늘 답답했다. 매번 ’음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스스로 자문하는 시간을 가졌다. 내가 생각하는 음악이란, 아티스트의 언어이자 소통 수단이다. 음악이 청자에게 가닿을 때, 청자가 아티스트에게 이입할 수 있고 자신만의 언어로 상상하여 재해석할 수 있는 이유다. 이 지점을 집착적으로 늘어지며 글을 쓰고 싶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내 생각을 내가 증명해내고 싶었다. 하지만 종종 고꾸라졌다. 글을 쓰면서 그 앨범이 가진 메세지를 내 방식대로 풀어내야 되는데, 그러고 싶은데, 항상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한 기분이었다. 내 스스로에 대해 만족하지 않은 날들이 많았다.


여성 아티스트 인터뷰 콘텐츠를 기획한 것도 그 갈증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티스트들이 음악으로 어떤 말을 하고자 하는지 궁금했다. 마치 정답을 찾아 헤매는 사람처럼 아티스트에게 마이크를 들이 밀었다. 그렇게 네 명의 여성 아티스트를 만났다. 정말 좋았다. 좋았다는 표현으로밖에 쓰지 못할 정도로 너무 좋았다. 어느 정도 해답을 찾은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갈증이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글의 방식이 잘못된 것일까 싶어 평론을 쓰면서 동시에 개인 에세이를 꾸준히 쓰기도 했다. 이 또한 운 좋게 책으로 발간할 수 있었으나 내 갈증을 완전히 해소해주진 못 했다. 어떤 성공을 바라고 쓴 건 아니거니와 내 글에 불만족하지도 않았는데 이상했다.


예술 속에서 사회를 발견하는 일

올해 대학원을 진학하고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사실 예술과 사회를 연결짓는 글이 쓰고 싶었던 거다. 음악 속 메시지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경위는 시대의 흐름 연구를 살피면 더 쉽게 이해된다. 이를테면 복고음악의 회귀는 단순히 ‘힙’ 때문이 아니라 기술의 발달로 음악으로 시간 여행이 가능해진 현대 사회, 공동체 해체, 공동의 상실감을 채우기 위해 각자의 ‘집’을 특정 시간 속에 심어두는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아티스트가 복잡한 가정사를 가지고 있다면, 그가 복고 음악을 구사하는 행위는 단순한 회귀가 아니라 그가 안정을 얻고 그에게 안락함을 주는 시대를 불러와 빅백에 파고들듯 편히 앉는 행위나 다름없다. 그러니까 음악을 단순히 음악으로만 보지 않고 사회와 연결짓는 행위를 나는 하고 싶다.


얼마 전 김윤아 인터뷰에 나온 말처럼, “예술이 사회를 담지 않는다면 그건 좀 허무한 일”이다. 동시에 예술 속에서 사회를 발견하지 않는 것은 평론가로서, 글쟁이로서 안일한 일이다.

김윤아 인터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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