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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연수 Oct 25. 2021

걷기 in 서울 1

성곽길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는 흥인지문을 통해서 한양으로 입성하여 종묘쪽에 진을 치고, 가토 기요마사는 숭례문으로 입성하여 남산 언저리에 진을 치게 되었답니다.  이 조선의 상징물인 한양성곽의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중에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일제가 없애 버리지 않은 이유는 임진왜란때 일본의 조선침략과 주둔을 상징하는 건물이어서 철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가토 기요마사가 성을 쌓고서 주둔했던 지역을 남산 왜성터라고 부르고 그 밑쪽이 오늘날 남산한옥마을터는 입니다.  일제 때는 그 터에 일본 헌병대가 주둔을 했습니다.  해방이 된 후에 수도방위사령부가 사용하던 장소를 1989년 서울시가 넘겨받아서 남산골 제모습찾기 일환으로 규모가 있었지만 재건축해야 했거나 개발지역에 위치했던 전통한옥 몇채를 이곳에 모아놓은 것이 남산한옥마을터입니다.  조선의 전통 모습을 후손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만든 장소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상당수의 집들이 조선이 망하는데 기여했던 친일파의 가옥들입니다.…”   한양성곽에 대한 해설 선생님의 설명은 남산자락으로 휘감아 돌아가는 아픈 역사이야기로 이어진다.  


코로나로 외출이 통제되기 시작한 이래로 정말 오랜만에 토요일 현장수업이 재개되었다.   3개월이면 끝이 났어야 하는 전문문화 해설사과정을  6개월째 연장과 재수강 거듭해 가며 듣고 있다.  한동안 온라인 강의만 듣다가 모처럼 야외수업이다.  주제는 한양도성..


낙산 코스

남산성곽 부터 시작한 순성놀이는 네시간 남짓 걷다가 쉬다가 하면서 동대문과  낙산구간을 넘어서 혜화문 앞에서 끝이났다.


“성곽 아랫부분, 큰돌로 쌓여진 부분을 몸체(체)자 ‘체성’ 이라고 하고 위에 올려진 낮은 담장을  ‘여장’이라고 합니다.”  여장은 한구간 한구간씩 나뉘어져 있는데, 이 한구간을 ‘타’ 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구간 사이의 공간을 ‘타구’ 라고 합니다.  ‘타구’ 를 통해서 바깥을 내다 보기도 하고, 전투중에는 활이나 총을 아래를 향해 쏘기도 했습니다.   여장의 위는 지붕돌 (옥개석)을 올려서 빗물이 성곽사이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막았습니다.   여장의 중간부분에 구멍이 세개가 있는데 양 옆의 두 구멍을 ‘원총안’,  가운데 구멍을 ‘근총안’ 이라고 부릅니다.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구멍을 내다 보시면 구멍의 각도를 다르게 주어서 원총안은 멀리 내다 보게 되어있고,  근총안은 성 바로 밑을 쳐다볼수 있는 방향으로 뚫려져 있습니다.”  오랜만에 바깥에서 성밑을 걸어다니며 수업을 하는 것이 힘이 들었는지 선생님의 마이크 소리에는 가뿐 숨소리와 해설이 같이 흘러 나온다.    


“주말에 이렇게 나오시면 신랑이 싫어하겠어요?”  누군가가 해설 선생님에게 물었다.  

“웬걸요.  그쪽도 주말에 나가요.  오늘은 아마 지금 쯤 골프장일 걸요.   주말에는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것 하면서 지내도 더 좋은 것 같아요.  괜히 같이 있으면 신경만 더 쓰이고 힘들어요. ㅎㅎ ”

수줍은 듯 하면서도 역사/문화 이야기만 시작하면 거침이 없는 해설선생님이 미소를 지으며 답한다.   


이런 이야기 들을때면 내처지가 떠오른다.  포항에서 직장관계로 인천으로 올라온 지 벌써 오년째다.  처음에는 주말부부를 하다가 그러다가 다시 월말부부가 되었다가 이제는 명절부부 쯤 된다.  서로 살가운 성격이 아니라 같이 살아도 대문대문한데..  이제 아예 같이 있는게 너무 서먹서먹해져 버렸다.   

‘우리 나중에라도 서울에서 살까?’  이렇게 물으면..

‘…..’   아내는 묵묵부답이다.    그럼 나는 ‘너나 살아라, 서울’ 정도로 이해한다. ㅠㅠ   

 

어디서 살까 하는 문제에서 제대로 헤어난 적이 없다.  늘 떠나고만 싶었던 부모님 집.  결혼을 하고도 같이 살았던 아내와의 공간에서조차 나는 늘 떠나고 싶었다.  아마도 지금까지 그 어느 곳도 내가 살고 싶어서 정했던 집터가 아니어서 그랬나 보다.  그래도 요즘은 서울이라는 공간이 점점 좋아진다.


낙산 & 남산


한양 성곽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한양천도를 결정한지 2년(1395년)이 지난 시점에 지어졌다.   자기 손으로 없애버린 국가 고려의 수도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를 결심하고서 종묘, 궁궐, 그리고 도성의 성곽까지 일사천리로 지어졌다.  이로서 이제 새로운 나라의 하드웨어가 완성되었다.


침묘(종묘)는 조종(의 신주)를 봉안하여 효성과 공경을 높이는 곳이요, 궁궐은 나라의 존엄을 과시하고 정령을 내는 곳 이며, 성곽은 안팎을 엄하게 하고 나라를 공고히 하려는 곳입니다. 이들은 모두 나라를 가진 사람이 마땅히 먼저 갖추어야 할 바입니다. 전하께서 천명을 받아 왕통을 여시고 아래로 여망을 따라 한양에 도읍을 정하였으니 만세에 한없이 이어질 왕업은 실로 여기에 바탕을 두고있는 것입니다.  (태조 실록)


태조때 처음으로 완성된 성곽은 조선왕조 오백년 동안 그 시기의 필요에 의해서 고쳐쌓여지기를 반복했다.  

한참 예전부터 여러 시대의 지층이 쌓이고 다져지기를 반복해서 층층별로 수십 만년씩의 다른 시대의 기억을 지닌 절벽의 단면처럼 한양성곽은 고쳐 쌓여진 시대별로 그 돌쌓기의 방법을 꼼꼼이 보여준다.  성곽에는 조선초부터 중기, 후기를 거쳐 구한말, 식민지.. 그리고 해방이후 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이 새겨져 있다.  


성(城)이라는 글자는 여러 뜻을 갖고 있다. 일본에서는 성이라고 할 때 대부분 전투를 위한 요새, fortress의 성격이 강하다. 서양의 성들은 성주의 거처인 궁전 castle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비해서 북경성과 한양도성은 도시를 감싸고 있는 큰 담, city wall이다.   (홍종우의 한양도성에서 인용)

 

맨 처음 성을 쌓았을 때는 바위를 다듬지도 않고서 그대로 사용한듯 자연에 가까운 돌들이 제각각의 크기로 쌓여져 있다.   수많은 작은 돌들 사이에 큰 바위들이 군데 군데 박혀있는 모습은 성벽이라기 보다는 반반하게 쌓아놓은 돌무더기들 같다.  단지 그 바깥 표면만 세월에 닳고 달아서 흑요석처럼 까맣고 맨들맨들하다.  그 다음으로 세종때의 성벽은 만주벌판을 호령하던 무인이었던 태조 이성계와 조금도 닮지 않았을 것만 같은 책벌레 손자의 시대답게 동글동글한 작은 돌, 마치 옥수수알 같이 생긴 돌들을 가지런히 쌓아놓았다.  그동안 여러차례 풍파를 겪으며 여기저기 불에 댄 흔적으로 겉면의 색깔은 거무튀튀하게 변해 버렸고,  돌들이 쪼개진 당시에는 남아 있었을 날카로움은 모서리와 테두리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세종 쌓여진 성곽의 돌은 정겹다.  날카로운 눈매와 날렵한 콧등의 젊은이의 얼굴이 격정의 세월 겪고서 넓어지고 둥글게 변한 중년 사내의 얼굴처럼 처연하게 정겹다.


석성과 토성을 번갈아 가며 쌓았던 태조때의 성이 홍수 때마다 말썽을 부려서 세종때는 전 구간을 석성으로 다시 쌓았다.  성곽은 다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같은 큰 전쟁을 겪은 후 숙종 때 대대적인 수리를 하게 되는데 그때는 백성들 동원하는 것 그만두고 각 군영에 맡겨서 쌓았다.   이때부터 성쌓기는 각과 선이 생명인 군인들이 쌓은 것 답게 요즘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성벽의 모습처럼 반듯반듯한 네모난 모습으로 나타난다.  돌들의 크기도 비교적 일정하게 유지가 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군대생활의 80%는 여전히 사역이었나 보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성쌓기는 순조 때 인데, 순조때의 성은 돌자체도 옆으로 큼직하게 잘라낸 돌로 가지런하게 쌓여져서 전체적인 모습이 안정감을 준다.  이때 부터는 자연을 필요에 따라 인공적으로 다듬어내는 기술이 상당수준까지 발전된 근대의 모습이 성쌓기에서도 발현된다.   


조선왕조 오백년을 거쳐서 왕조의 흥망성쇠를 같이 했던 한양성곽은 조선이 망한 뒤 일제 때에 본격적인 훼손을 당한다.  근대적 교통설비 확장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혹은 전근대 조선이라는 나라의 잔재를 털어버리고 확고한 식민통치를 하겠다는 미명하에 여기저기 많이 훼손을 당했다.


성벽은 현대인들의 필요에 의해서 여기저기 끊어졌지만, 한양도성은 여전히 도시 서울과 공존하고 있다.   도성의 보존은 특이하게도 1968년 1월에 북한 무장공비가 서울 세검정 일대까지 잠입한 사건을 계기로 촉발되었다.  


박대통령 각하께서는 지난 75년 귀중한 국방유산인 서울성곽의 보존을 위해 서울성곽을 전면조사하여

복원가능한 부분을 모두 복원하도록 분부하셨다.  1976년 서울특별시장  구자준    서울한양도성 중에서


낙산 코스


없어져버린 대문을 새로 만들고 많은 성벽이 복원되었다.  추억의 동대문 운동장이 없어지고 동대문 일대가 새로 개발되면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되었던 수문과 땅속에 묻혀있던 성곽까지 다시 나타났다.  하나의 추억은 없어지고 또 다른 옛날 기억이 새로 솟아난 것이다.   성곽은 90여년 간의 암흑기를 묵묵히 견뎌내고 도성의 원형이 제법 그럴듯하게 모습을 드러내었다.  현재 한양도성은 전체의 70%, 총 13.370km(2014년 기준) 구간이 남아 있다.


도성의 구조는 내사산 (백악산(북악), 낙타산(낙산), 목멱산(남산), 인왕산)을 축으로 옛 서울의 도심을 부드럽게 감싸 안고서 돈다.   총 길이는 대략 18킬로 정도..  내사산중에 어느 산이던 성곽이 지나는 산허리 쯤에 서서 도심을 쳐다보면 조선이라는 나라의 수도가 고스란히 한눈안으로 들어온다.   이 자그마한 지역에서 조선왕조 5백년의 역사 태반이 비롯 되었다고 생각하니 아득하다.  육백년 묵은 역사의 냄새가 도성자락을 타고 진하게 풍겨 나온다.  


우리 조상들의 대부분 건축물들이 그러하듯이 한양도성도 원래의 자연경관의 원형을 되도록 유지하면서 쌓으려고 한 흔적이 역력하다.   인왕산을 넘어가다가는 바위를 그대로 성곽의 일부로 이용하기도 하고, 백악산에는 휘어진 산길의 모양을 따라가며 곡성을 쌓았다.  남산에는 비탈길 위로 성곽을 올려놓아서 밑쪽의 민가와 위쪽의 성곽 공간을 자연스럽게 구분을 했다.  개입은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안과 밖의 구분을 두어서 서울(나라)의 경계를 명확히 한다는 목적은 충분히 살렸다.  이런 것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들 눈에는 정말 묘하게 보이는 도시성곽이다.


4시간 남짓을 걸으며 남산성곽구간,  광희문, 동대문역사공원, 동대문(흥인지문), 낙산성곽구간, 혜화문의 한양도성 역사탐방은 나머지 구간에 대한 순성을 약속을 하며 끝이났다.  서울의 산길에 사람이 없어서 마주쳐 오는 사람과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하고서 걸을 필요가 없는 것은 요즘이 처음 있는 경우다.  올초까지 관광객으로 미어 터지던 서울의 옛 터들이 코로나 덕택에 모처럼 편안해 졌다.   


오래된 것이 좋은 이유는 ‘여여함’ 이 있기 때문이다.  오래도록 지금의 이 자리에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  주변의 사물들과 하나의 풍경속에 이미 충분히 어우러져, 만약에 그것이 없어진다면 그 장소 전부가 다른 장소가 되어버리고 말 것만 같은 ‘여여한 존재감.’ 있어서 좋다.   비록 한낱 돌덩이 무덤에 불과하지만 몇백년을 한마디 말도 없이 묵묵히 세상의 부침을 견뎌내고 서 있는 그 존재에 내 감정을 이입해 보는 것은 만만치 않은 감흥을 일으킨다.


어릴적부터 잊혀지지 않는 기억 중에 하나가 동생이 태어나면서 엄마 방에서 할머니 방으로 쫓겨나서는 한동안 할머니랑 같이 지냈을 때이다.   할머니는 밤만 되면 항상 엄마방으로 돌아가서 자겠다는 나를 달래면서 항상 옛날 이야기를 해 주시곤 했다.


“옛날 옛적에 서울의 어느 산이 집채만한 호랑이가 살았는데 한번은 임금님 계시는 궁궐 담짝을 훌쩍 뛰어넘어서 임금님 계시던 전각을 항해서 마구 달렸던 것 아니겠니....”.

할머니의 레파토리는 늘 비슷비슷하기는 했지만,  그 덕에 동생에게 엄마를 뺏긴 슬픔도 잊고서 지낼 수 있었다.

할머니 이야기가 엄마품 속이었고 젖무덤이었던 셈이다.   


팔자 탓인지 한 장소에서 지긋이 살지 못하고 여기저기 여러곳의 도시들을 전전하며 살다가 이제는 나이를 좀 먹었는지 요즘에는 한곳을 정해서 살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한다.   집값 생각하면 끔찍한 곳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서울이 좋다.  서울이 좋은 가장 큰 이유는 서울이 간직한 이야기가 좋아서다.  아라비아 나이트 처럼 밤에 시작해서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 이야기해도, 그 이야기를 천일동안해도 끊어지지 않을 것만 같은 이야기 천국 서울이 좋다.   

각자성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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