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릉
오사카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성남으로, 성남에서 보스턴으로, 보스턴에서 다시 성남으로, 성남에서 칭다오로, 칭다오에서 포항으로, 포항에서 인천으로... 음... 서울에서 살고싶은데 서울 언저리만 떠돌다 죽을 팔자인가...
부산 부모님 집을 나와서 영등포 버스 정류장에 쓰레기차에서 쓰레기 쏟아내듯 구겨진채 떨어져 내린게 1995년 2월 5일이었다. 영등포에서 성남이모집으로 가던 버스에 울리든 새벽 라디오 방송의 노래는 DJ DOC의 ‘수퍼맨의 비애’ 였다.
슈퍼맨 슈퍼맨 슈퍼맨 헤이 홉
선물을 준 숫자만큼 날 사랑할까
아닐꺼야 난 너에게
지쳐 가고있어
넌 나에게 바라는게
왜 그리 많아
무엇을 더 해야하지
지쳐가고있어
내게 해준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이 사회는 언제나 처럼 내게 열심히 살것만 요구했다.
그래도 타향살이는 나름 재밌었다. 익숙하지 않은 낯선 장소는 곧잘 내게 말을 걸어온다. 우리는 통성명을 하고 서로의 실체를 탐색한다. 어릴 적, 할머니 등에 엎혀서 다닐때 부터 뭔가 새로운 것만 보면 두리번 거리는게 취미였던 내게 서울거리 중에 참 특이하다고 생각한 것은 여의도 국회의사당도 아니고, 63빌딩도 아니고 선정릉이었다. 빌딩 숲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진 나지막한 언덕같이 무덤들은 참 묘한 느낌을 준다.
조선의 왕릉은 총 42기가 있다. 조선의 통틀어 모든 왕과 왕비의 릉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중 40기는 남한
땅에 있고 2기가 북한땅에 있다. 2기는 조선이 세워지기 전에 죽은 태조의 원비 신의왕후 한씨의 제릉과 2대 임금 정종과 그의 비 정의왕후의 릉인 후릉으로 모두 개성지역이 남아 있다.
선릉은 조선의 9대 임금 성종과 그의 비 정현왕후 윤씨의 무덤이다. 선릉을 지나쳐 언덕을 넘으면 무덤이 하나 더 있는데 이것은 두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폭군 연산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중종의 릉인 정릉이다. 그래서 선릉과 정릉은 아버지, 어머니, 아들이 같은 장소에 누워 있는 셈이다. 수많은 왕릉터 중에서 이런 조합은 여기가 유일하다.
선릉의 정자각 뒷편으로는 호텔이 보인다. 저 호텔에서 묵는 사람은 아침마다 이 바쁜 도시의 가장 한가로운 모습을 볼수 있겠지.. 호젓한 산책로를 생각하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주변 아파트 값이 조금은 용서가 된다.
지금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금싸라기 땅 중에 한곳이 되었지만, 조선시대까지는 수도인 한양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야만 접근이 가능한 지역이었다.
마스크를 쓴 채로 해설을 이어가기가 못내 아쉬웠는지, 숨을 고르는 채 하며 가려진 코와 입을 잠간씩 보이며 이어가던 선생님이 다시 마스크를 고쳐쓰고 본격적으로 설명을 이어간다.
“왕릉은 능역의 시작인 금천교로 대표되는 진입공간, 제사가 이루어지는 정자각이 있는 제향공간, 그리고 능침이 있는 신의 공간으로 나뉘어 집니다. 여기에 보이는 곳이 능침공간인데 능침공간은 다시 하계, 중계, 상계로 3단으로 나뉘어 집니다. 구분이 되도록 단으로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제일 아래 하계는 무인석과 석마 그리고 중계는 문인석과 석마, 상계는 봉분과 봉분을 보호하기위한 석양과 석호같은 석물 들이 있습니다. 봉분 앞의 널찍한 석판은 혼유석이라고 하는데 제사상을 차리기 위한 것이라 착각하기 쉽습니다만, 용도는 왕과 왕비의 혼이 노니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제사는 저 아래 정자각에서 지내는 것이고 이곳은 순전히 죽은자의 혼백을 위한 공간입니다. 살아있는 자가 이곳까지 올라오는 일은 무덤을 정갈히 하기 위해서 능지기가 올라오는 것 말고는 없었습니다.
선릉은 아시다시피 성종임금님의 묘인데요…. ”
성종과 폐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연산군(燕山君)은 조선 제10대 왕으로 자신이 폐비 윤씨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가 선릉을 조성하던 중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장례를 치를 때 새기는 묘지(묘지)에는 죽은 사람의 이름과 생몰년 행적 그리고 무덤 좌향들을 새겨 무덤 앞에 묻는다. 왕릉은 묘가 아닌 능이기에 이를 지석(지석) 이라 하며 왕릉 앞 10자 전방에 8자 깊이로 파서 정성껏 묻는다. 이때 지석에 새기는 지문은 추호도 속임이 없이 사실대로 쓰여지고 된다.
성종 선릉의 지문에서 폐비 윤씨의 아버지 윤기견이라는 이름를 접하고서 친어머니로 알고 살았던 정현왕후의 아버지 윤호와 이름이 다른 것을 추궁했고 결국 자신이 정현왕후 윤씨의 소생이 아니라 폐비 윤씨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성종은 폐비 윤씨의 사사를 100년간 누구도 거론치 말라고 했지만 연산은 성종이 죽자마자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사실은 윤씨에 관여된 모든 이들 (할머니 대왕대비까지 포함해서)과 연산 자기 자신마저 저주로 태워버렸다.
비록 아들은 희대의 미친놈으로 미친짓이 너무 과해서 운나쁘게 왕위에서 쫓겨나 쓸쓸히 죽지만, 아버지인 선릉의 주인 성종(왕이 되기전 자을산군) 은 무척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세조의 첫번째 아들로 세자 시절 죽어버렸던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로 서열상 왕이 되는 것은 많이 뒤쳐진 사람이었는데 장인이었던 한명회의 세력과 할머니 정희왕후 윤씨의 의지로 왕이 될 수 있었다.
조카 죽이고 왕이 되었다고 욕을 먹던 할아버지 세조가 왕위찬탈이 결코 자기자신 만의 안위를 위해서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왕릉조성 노역에 동원된 백성들 수고로움을 덜어주려고 왕의 무덤을 돌을 되도록 쓰지 말고 회격으로 쓰고 특히 사람이 많이 필요한 병풍석을 없애라는 유언을 대놓고 무시하기라도 한듯... 멋진 병풍석과 덩치가 우람한 석인들로 장식된 성종의 묘, 선릉은 가까이 능침공간을 볼수 있도록 친절히 길까지 만들어져 있다. 무덤의 건너편으로는 서울에서도 가장 번화한 강남 테헤란로의 빌딩숲이 펼쳐져 있다.
성종의 릉 옆쪽 언덕에는 주말 오후의 한가로운 한때 같은 정현왕후 윤씨의 묘가 있다. 그녀는 성종의 세번째 비였다. 투기로 왕의 얼굴에 상처를 내었다는 죄목으로 지아비에 폐서인이 되어 결국 시어머니와 남편에게 사사를 당한 연산군의 친모 공혜왕후 윤씨에 비해서 정현왕후는 무척이나 무던한 성격이었던지 성종의 유난스러운 여성편력에도 그와 잘지냈고, 자신 길러준 어미가 친어미가 아니었고 친어미는 아버지와 할머니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것을 알고나서 것을 패륜으로 폭주했던 연산의 치세도 별 큰 문제없이 잘 지낸듯 하다. 죽어서도 한편으로는 남편이 묻혀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들 곁에 묻혀서 여전히 별탈없이 잘 지내고 있다.
선릉의 나지막한 언덕을 가로질러 총총히 내려오다 보면 전면으로는 강남의 빌딩숲이 그리고 오른편으로 정릉이 나타난다. 릉이 있는 언덕으로 올라가지 말라는 관리인의 눈을 요령껏 피해서 올라가면 릉의 앞쪽으로는 강남의 사무실 빌딩숲이 펼쳐지고 옆으로는 키낮은 주택가 건물들의 전경이 눈 한가득 들어온다. 도심 한복판의 무덤..
정말이지 묘한 조합이다.
릉의 아래쪽에서 오르막길을 쳐다보고 있으면 누가 귀뜸해 주지 않아도 정릉의 지대는 유달리 낮은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비가 많이 와 강이 범람을 하면 이곳까지 물이 들어차서 릉으로의 출입을 배를 타고 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중종의 묘, 정릉이 처음부터 지금 이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원래는 고양의 서삼릉능역에 묻혀있던 첫번째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희릉 옆에 묻히면서 능의 이름도 정릉으로 바꾸어 있었지만 지금 이곳으로 오게된 것은 중종의 세번째 비인 문정왕후의 욕심 때문이다. 반정으로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억지로 왕이 된 중종은 제위 기간 내내 반정공신들과 조광조 같은 사림 신하들의 눈치를 보며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았을 터인데 죽어서도 한자리에 있지 못하고, 이번에는 마누라 등쌀에 묘자리까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의 첫번째 처는 연산군의 처남이자 그에게 아첨하던 신수근의 딸 단경왕후 신씨였다. 폭정으로 치닫던 연산군 12년 어느날 밤, 우의정 강구손은 반정 이후 중전 문제가 걱정되어 좌의정 신수근에게 이런 질문을 은밀히 던졌다.
“좌상 대감께서는 누이와 딸 중 누구를 더 중하게 여기십니까?” 신수근은 누이의 편을 들며 황급히 자리를 떳고 며칠 후 그는 길거리에서 살해를 당한다. 만약 신수근이 딸 편을 들었더라면 연산에 이어서 중종때까지 문중의 광영을 그대로 이어질 수도 있었겠지만 순간의 판단 착오로 후세 족보까지 매장되어 버렸다.
반정의 성공 이후에 신수근의 딸이자 중종의 첫번째 왕비였던 단경왕후 신씨는 강제로 폐출되었다. 그리고 얻은 계비가 장경왕후 윤씨였는데 윤씨는 중종의 뒤를 이은 왕 인종을 낳은 후에 7일만에 산후병으로 죽고 말았다. 장경왕후 윤씨 이후의 두번째 계비가 된 사람이 문정왕후 윤씨이다. 훗날의 역사가 이야기해 주듯이 그녀는 정말 드센 캐릭터 였는지 그다지 중종의 사랑을 받지 못했나 보다 시집온지 19년 후에나 겨우 아들을 출산할 수 있었다.
중종이 승하하자 그의 유교에 따라 장경왕후 곁에 예장했으나 그 꼴을 보지 못한 문정왕후는 릉을 지금의 정릉이 있는 곳은 강남구 삼성동으로 천장을 하고 자신이 지아비 곁에 눕고자 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죽은 해에 홍수가 나서 장사를 치룰 수가 없어서 노원구 공릉동의 태릉에 묻히고 만다. 선릉과 정릉은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서 재궁이 파헤쳐져 불에 타는 수난을 겪는데 태릉은 그런일은 당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임금과 왕비의 무덤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무인석과 문인석 사이로 보이는 건물들이 그 현대적 생김새와는 상관없이 무척 한국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착각은 아닐 것이다. 과거와 현재는 언제나 저마다의 모습으로 각각 존재하고 있지만, 간혹 이곳 서울같이 그들이 한자리에 나란히 서 있으면.. 그 사이의 공간과 시간 속에 우리의 본디 모습이 떠오른다.
무덤의 주인들이 이렇게 이야기한다. “당신들은 나의 과거이고 나는 당신들의 미래 입니다. 나는 한때 당신들과 같았고, 당신들은 곧 나처럼 될 것입니다.”
몇백년간의 계절을 묵묵히 버티고 있는 무덤이란 실체 옆으로 내일이면 사라진다는 것도 잊어먹고 사는 하루살이들이 오늘도 바쁘게들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