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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문장들을 찾아줘



나는 할머니 무릎에 누워 흘러나오는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했다.

따스한 온기가 새어 나오던 그곳. 할머니가 아무렇게나 만들어낸 이야기에는 예측할 수 없는 재미가 있었다. 차가운 기계가 가공한 새것 같은 이야기가 아닌 그저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들. 오리지널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어루만짐과 여유로움. 할머니가 가진 이야기보따리를 하나하나 풀어 듣고 있노라면 얼었던 마음이 노곤해지곤 했다. 기계 속에서 차가워진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런 순간이 찾아왔다.


몇 달 전 구수한 따스함을 전해주었던 할머니와 작별을 했다. 온기 없는 빈방에 앉아 괜히 할머니가 남긴 일기장을 읽고 또 읽는다. 우리가 함께했던 이야기가, 살아 있는 사람의 마음을 통과한 언어들이 동그란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젊은 시절 소설가였던 할머니는 어느 시점부터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한 글을 쓰지 않으셨다. 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느냐는 나의 물음에 할머니는 언제나 삐죽한 표정으로 입을 닫아 버렸다. 늘 우리의 대화는 묘연한 분위기로 마무리되었다.



됐다.


할머니는 무엇이 됐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됐다는 한마디 말로 모든 것을 알 수 없었다. 무엇이 할머니를 쓰지 않는 사람으로 만든 것인지. 사람이 쓴 글로는 더 이상 벌이를 할 수 없는 시대에 살게 되었기 때문일까. 마음에 남는 문장들을 엮어 내더라도 문장들을 소리 소문도 없이 도둑맞는 현실 때문이었을까. 사람보다 더 정교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 주머니를 들고 나타난 AI란 녀석 때문이었을까. 이유가 무엇이든 이 시대를 살고 있던 할머니뿐 아니라 사람들이 품었던 쓰고자 하는 마음들이 단번에 꺾여 버린 것만은 분명했다. 두툼한 손으로 벼들을 가득 움켜쥔 후, 날카로운 낫으로 한 번에 모두 베어버리듯.


스스로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 보리며 조우할 수 있는 기회를. 삶 속 이야기들을 풀어놓으며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던 위대한 창작자들의 발자국들은 이제 더 이상 없었다. 지금은 그 누구도 책상 앞에 앉아 마음속에서 요동치는 고요한 생각을 글로 풀어내고, 문장들을 아름답게 다듬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이 시대는 그런 것들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고 있었다.


훔친 문장을 그럴듯하게 변형해 새로운 것을 창작하고, 이를 씨앗으로 대중들의 도파민을 자극할 수 있는 이야기를 선물하는 자는 사람이 아닌 "생성형 AI 스틸"의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2050년을 살아가는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보통의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어쩌면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글이 훗날 2050년 사람이 창작한 희귀한 유물로 남을지도. 우리 인간은 본래 창작하는 존재였다는 것을 다시 기억하게 해 준 할머니를 생각하며, "쓴다"라는 행위를 조심스럽게 시작한다.



약 25년 전인 2023년 생성형 AI가 본격적으로 등장했을 때, 창작하지 않는 미래가 올 것이라고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인간 앞에 나타난 생성형 AI는 보통의 인간보다 더 정확했고, 창의적이라고 평가되는 문장들을 쏟아냈다. 마치 통섭과 같이. 사람들은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어 내는 생성형 AI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신기함과 편리함 때문이었을까. 사람들은 오랜 시간 편리함 뒤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발견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AI가 사람보다 똑똑하다고 감탄했지만 반짝이는 모습 뒤에서는 교묘하고 은밀하게 훔쳐진 문장들이 끝없이 복제되고 있었다. AI는 깔끔하게 포장한 창작물을 내놓으며 이용자들의 만능비서가 되었다. 수많은 창작자들이 밤새 만들어 낸 문장들이 어떠한 대가도 지불되지 않은 채 AI개발회사로 흘러 들어가 그들을 위한 거대한 자본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2025년. AI 개발회사와 저작권자 사이에서는 거대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도둑맞은 창작물을 찾기 위한 투쟁은 유럽과 미국을 시작으로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저작권을 가진 글로벌 회사뿐 아니라 개인들까지 법정으로 몰려들었다. AI 개발회사와 세계 어린이들에게 멋진 만화영화를 제공했던 D회사와의 싸움이 은 신문의 국제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이와 유사한 큰 싸움, 작은 싸움들이 법정에서 벌어졌다.


법원에서는 이 사건을 판단함에 있어 *공정이용(Fair Use) 법리를 제시하였다. 저작권자들은 이를 방어논리로 내세우며 AI 개발회사가 공정이용 원칙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싸움은 AI 개발회사의 완벽한 승리로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공정이용 법리: 미국 저작권청은 생성형 AI 모델의 개발과 배포 단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저작권 침해를 판단하는 법리를 제시했다. ①변형성 및 상업성, ② 창작성, ③ 이용된 부분의 양과 실질성, ④ 저작물이 시장에 미치는 영향
<2025년 5월 미국 저작권청이 발표한 AI훈련을 위한 저작물 이용에 관한 포괄적 보고서 참조>


창작자들이 이 전쟁에서 패배하게 된 이유는 분명했다. 당시 창작자들은 AI 개발자들이 자신의 창작물을 AI 학습 과정 전반에서 사용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려 했지만 이를 입증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AI를 학습시키는 과정은 빅테크만이 보유한 고도의 기술이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은 철저히 기업 기밀로 부쳐졌고, 외부인인 저작권자들은 절대 알 수 없었다. 결국 공들여 만들어 낸 창작물이 무분별하게 이용되어 저작권이 침해받았다는 창작자들의 주장은 추정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AI 개발회사들은 법정에서도 AI를 학습시키는 기술은 회사 기밀 정보를 내세우며 교묘하게 모든 정보를 빈틈없이 감추었다. 짧은 시간 동안 막대한 자본을 거머쥐게 된 AI 개발회사들은 정치권에도 손을 뻗기 시작한 반면, 도둑맞은 창작물을 찾아 달라는 창작자들의 목소리는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일부에서는 AI 개발회사들이 미래에 생성형 AI를 더욱 발전시키고 풍요로운 창작 토양을 만들기 위해서는 창작자들을 존중하고, 창작물이 잘 자랄 수 있는 토양을 키워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를 위해 AI 개발회사들이 생성형 AI를 교육하는 과정에서 이용했던 지적재산에 대한 내용을 요약해 공시하고, 지적재산 이용료를 저작권자에게 지급하는 방안이 제도적으로 정비되어야 했었다.


하지만 AI 개발회사들은 이용자들에게 받은 수익금을 저작권자들과 나눌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롯이 자신들만이 가져가기를 원했다. 공짜로 훔쳐 온 문장으로 만들어낸 창작물이 만들어낸 창작물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AI 개발회사의 탐욕은 창작자들이 가진 의욕을 불살라 버리기 충분했다. 사람들이 가진 창작을 하고자 하는 욕구가 사라져 가는 사이 생성형 AI는 훔쳐진 문장들을 24시간 쉬지도 않고 빨아들이며 몸집을 거대하게 키우며 점점 똑똑하게 변해갔다. AI는 밤새 고민하며 생산했던 창작물들을 기반으로 더 창의적인 작품들을 내놓고 있었다.


대중들은 이제 사람이 아닌 AI가 내놓은 창작물로 몰려들었다. 어떠한 흠결도 없는 문장들, 사람들의 칭송을 받아온 고전과 현대 문학이 융합된 AI가 만든 새로운 장르에 대한 사람들의 열기는 식을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텔레비전에서도 그리고 서점에 출판되는 책도, 음악도 심지어 신문 기사까지 모두 생성형 AI가 쏟아낸 글들이 우리 주위를 채우기 시작했다. 인간은 더 이상 어두운 방구석에 앉아 이야기를 고민하고, 문장을 다듬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작업을 더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창작을 업으로 삼았던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좁은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인간 작가가 사라진 시간, 우리의 주변은 훔쳐진 문장 위에 새로운 옷을 입힌 기계가 만든 문장들로 채워졌다.

그렇게 아무도 쓰지 않는 시대가 도래했다.



2050년 현재, 'AI 스틸'은 창작물을 생성하는 AI로는 가장 독보적인 모델이 되었다. 2050년 문화계의 거장은 바로 AI스틸. 이제 스틸은 문학 분야, 음악 분야, 영화 분야, 미술 분야를 이끌어 가고 있는 문화계의 심장이 되었다.


20년 동안 인간들이 창작해 놓은 수많은 문장을 훔치기 시작했기에 가능했다. 물론 스틸 뒤에는 스틸을 만들고 교육했던 AI 개발회사가 있었다. 스틸을 훈련하며 수많은 자료들이 사용되었고, 이 과정에서 저작권 침해가 빈번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남몰래 훔친 문장들을 흡수한 스틸은 점점 더 정교한 작가가 될 수 있었다. 스틸을 개발한 AI 개발 회사는 엄청난 부를 손에 쥐게 되었다. 문장을 도둑맞은 작가들은 점점 더 가난해졌다.


이제야 고백하자면 나 역시 아무도 쓰지 않는 시대를 만든 공범이었다. 그날의 대화가 그렇게 마무리되지 않았더라면 어떠했을지 생각한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때 그날을 다시 회상한다.


나는 2025년 스틸을 만든 AI개발회사 T 개발자로 일했다. 개발자라면 스틸을 훈련시키는 과정마다 수많은 문장과 지식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법적 전문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 과정에 저작권 침해라는 법적 위험 요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냥 진행해!"


T개발회사 대표 제임스는 어떠한 고민도 하지 않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 표정은 기계와 같았다.


"위험합니다. 이사님, 법적인 위험을 고려해야 합니다."


법적인 리스크 검토를 담당하고 있던 김변호사는 법적인 위험을 고려했을 때, 저작권자들과 협상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의 의견은 가차 없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AI 스틸을 학습시키는 과정 속에는 많은 저작권 침해가 발생하고 있었다. 다소 복잡한 과정이지만 쉽게 풀어 설명하면 AI 스틸을 학습시키는 과정은 인간을 교육시키는 과정과 흡사하다. 먼저 자료를 수집한 후 고급 자료를 선별해 내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필요한 저작물을 내려받은 후, 전송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때 복제권 침해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크다.


다음으로 AI 스틸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지식들을 기반으로 새로운 것들을 창작해 내는 훈련을 창작모델 훈련을 받게 된다. 이 단계에서 스틸은 지금까지 훈련 데이터를 기억하고 이를 변환해 다시 저장하게 되는데, 이 단계에서도 복제권 문제가 발생한다. 더해서 이차적 저작물작성권 침해도 함께 발생하게 된다.


2단계 교육과정을 거친 후 AI스틸은 검색증강 생성(RAG)과 출력 단계를 거치게 된다. 검색증강 생성 단계란 지금까지 복제하고 축척한 저작물에 들어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응답을 생성하고 창작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과정을 말한다. 이 과정에서 또다시 복제가 이루어지고, 기존에 창작된 콘텐츠에 새로운 옷을 입혀 유사한 콘텐츠를 생성할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에서는 직접적인 저작권 침해가 발생하고 있었다.


대표 제임스 역시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그런 사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제임스가 저작권자들과 협상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말에 당황해 있는 나와 김변호사에게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래. 여기서 그거 모르는 사람 있어?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뭐 그리 심각하게 하지? 우리가 성공하려면 수많은 저작물을 훔쳐서 AI 스틸을 훈련해야 한다고. 그리고 창작자들이 어떻게 알겠어. 이런 교묘한 과정들을. 이건 영업기밀이라고. 절대 알 수 없지. 정치적인 문제는 우리가 뒤에서 잘 손을 쓸 테니 걱정하지 말고 진행하라고."


제임스는 아까보다 더 밝아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 아래 수많은 창작자가 피켓을 들고 외치고 있었다. 커다란 피켓들마다 빨간 스프레이로 같은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훔친 문장들을 돌려달라! 돌려달라! “


창작자들은 건물 아래에 서서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그 어떤 목소리도 우리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두꺼운 통유리에 둘러싸인 우리의 방은 아주 고요했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 북을 치며 시위하는 창작자들을 너무나 선명하게 내려다 보였다. 그 자리에는 할머니도 앉아 계셨다. 그들은 유리 안에 있는 우리를 절대 볼 수 없었다. 우리가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었다.


마치 수십 년 동안 스틸 AI가 거대한 속도로 주인이 있는 그들의 문장들을 남몰래 훔쳐내는 모습처럼.


*메인화면 : 핀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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