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기 위해 쓴다.
누가 책을 내보라고 했다.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점점 그 말도 안되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뱅뱅 돌고만 있는 이 지긋지긋한 반복의 세계에서 나도 한 번즘은 완전히 빗나가고 싶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제껏 말도 안되는 생을 살아왔던 거 같다. 그래서 쓰기로 한다. 인생은 원래 말도 안되는 것이라고. 절박한 심정으로 친구에게 토로하듯이 말이다.
기쁨과 슬픔 사이에는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무수한 감정들이 있다. 이 책은 바로 그 지점에서 씌여진 나의 무기력의 기록이다. 사실 글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중얼거림 같은 것이다. 최초의 에세이 집이라고할 수 있는 몽테뉴의 수상록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독자여! 여기서는 나 자신이 바로 내 책자의 재료다.” 그리고 몽테뉴는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도 경박하고 헛된 일이니 그대가 한가한 시간을 허비할 거리도 못 될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이 책은 형편없는 나의 삶을 재료로 하고 있다. 그래서 당신이 이 책 속에서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거나 어떤 위로를 기대한다면 솔직히 실망할 수도 있다. 몽테뉴의 말마따나 이 책은 추호도 그대에게 봉사하거나 내 영광을 도모하기 위해 씌여진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살기로 마음먹었더니 삶은 죽일 듯이 나를 목조른다. 그래서 죽기로 했더니 삶은 다시 내게 다정한 얼굴로 꿈과 용기를 준다. 우울하다. 하지만 이 우울이 영원할 거라는 어린아이같은 생각은 이제 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우울한건지도 모른다. 차라리 명백한 불행이었다면 평생 마른 열매처럼 잘 살았을 텐데. 차라리 죽고만 싶은 심정이어도 한숨 자고 일어나면 다시 꾸역꾸역 살아갈만한 힘이 생긴다는 건 정말로 비극적인 일이다.
스피노자는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그 순간, 고통이기를 멈춘다고 했다. 나는 거기에 희망이라는 배팅을 걸었다. 물론 쓴다고 해서 작금의 고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질 것이라고는 생각 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것도 씌여지지 않은 흰 종이는 무언가를 쓰지 않으면 안 될거 같은 기분을 만든다. 무의미한 글쓰기는, 이 쓸모없는 글쓰기는 왜 그런지 나를 살게 한다. 그냥 이런 나를 만 천하에 보여주고 싶다. 만약 누군가 이런 병적인 센티멘탈리즘으로 가득한 글들이 부끄럽지 않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부끄럽기 위해 쓴다고 대답할 것이다. 부끄러운 것만큼 나를 움직이게 하는 건 없다. 나는 그저 좀 더 부끄러워서 더이상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