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잼써 Dec 12. 2023

엄마네 가족과 내 가족이 각자 행복하길

자기를 힘들게 했던 엄마에게 보복을 하고 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글쓴이는 엄마에게 보복을 하고 싶을 만큼 힘든 어린 시절을 겪었을 거다. 힘들어 하는 엄마가 마냥 통쾌하다는 듯 글을 썼지만 사실 그 마음이 썩 유쾌하지는 않을 거다.


엄마에게 하는 보복은 달콤하지 않다. 복수의 대상이 완벽한 타인이라면 그 사람 무덤 앞에서 락킹 댄스를 신나게 춘 후 ‘좋은 유산소 운동이었다’며 개운한 상태로 하산할 수 있다. 하지만 가족끼리의 원망은 복수로 심플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게 미운 엄마라도, 다른 사람에게 불미스러운 일을 당하고 왔다면 눈이 돌아간다.


누군가를 극도로 미워하고 보복하는 건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일이다. 글쓴이는 아직까지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자신을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고 있었다. 그전까지는 엄마 때문에 힘들었다면, 이제는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을 뿐이었다.


내 인생의 절반은 이해할 수 없는 나 자신과 사투를 벌이고, 엄마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 자신에 대한 분노, 엄마에 대한 원망. 이 모든 게 뒤섞여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불안해 하고, 현재를 불행하게 지냈다.


나를 그저 피해자로 생각해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남은 인생은 내 책임이라는 걸 깨달았다. 성인이 된 나는 이제 남은 인생을 내 의지와 방향대로 살 수 있는 힘이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무기력하게 지내온 시간이 길었기에 그 힘을 알아채기까지는 오래 걸렸다. 


못마땅하게 느끼는 나를 용서하고, 지금 나로서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걸 마음 깊이 알게 되면서부터 점차 그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쉽지는 않았다. 트라우마에서 벗어났다고 말하기까지 10년 이상 걸렸다. 나를 이해해보고자 읽은 심리학 책만 수십 권은 됐다.


내가 깨달은 것 중 하나는 현재와 미래를 제대로 살기 위해 과거를 정리할 필요는 없다는 거였다. 트라우마가 되어 현재까지도 나를 괴롭게 하는 무언가가 있을 때, 그저 그쪽으로 눈길을 주지 않으면서 살아가면 됐다.

상처를 매일매일 곱씹고 쳐다보면서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완치를 위해 이리 후비고, 저리 후벼 보는 일은 무의미한 짓이다. 그냥 잊고 살다가 가끔씩 재현되는 상처의 쓰라림을 조금 감내하는 편이 훨씬 낫다. 상처와 관련 없는 나머지의 순간을 온전히 만끽하며 살아왔다면, 그 쓰라림도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다.


엄마를 용서할 필요도 없었다. 내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채 남을 용서하는 건 에너지가 많이 들고, 효과도 별로 없는 일이다. 그냥 서로 맞지 않았던 개인과 개인 사이에 벌어진 일에 건조하게 유감을 표하고, 나를 위한 삶에 집중하면 된다.


나는 아직 엄마가 어색하고, 우리집은 화목한 가정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나를 위해서, 엄마는 엄마를 위한 삶을 각자 살되, 접점이 생기면 가끔 교류하는 정도이다. 엄마가 더 넘어오려고 하면 나는 담백하게 거절한다. 나와 엄마를 인간 대 인간으로 봤을 때 이게 가장 이상적인 관계라고 생각한다. 서로를 상처주지 않을 만큼 거리가 딱 이 정도였다.


이제는 시효가 끝난 엄마네 가족은 쿨하게 정리하고, 내 가족을 위한 삶에 집중해야 할 때다. 내 가족이라는 게 남편과 자식이 있어야만 되는 게 아니다. 성인이 된 후부터 내 가족은 1인 가족의 구성원인 ‘나'로 구성되어 있다. 엄마네 가족과 내 가족이 각자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분명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