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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잼써 Jan 30. 2024

용서하지 않아도 돼. 그러나 과거는 흘려보내야 해.

나는 용서라는 개념을 좋아하지 않는다. 용서를 해야 하는 쪽은 상처 받은 사람이다. 용서를 운운하는 건 이미 상처 받은 사람에게 더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뜻으로 받아 들여진다. 


용서가 이루어지는 과정도 마음도 마음에 안 든다. 상처 준 사람은 자기가 내킬 때 사과를 하지만, 상처 받은 사람은 빠른 시간 안에 답을 해줘야 한다. 사과를 한 사람은 자기가 먼저 행동했다는 이유로, 당당하게 상대에게 용서를 강요하기도 한다.


게다가 한번 용서를 했다면 그 일은 마치 없었던 것처럼 취급되고, 다시 언급하는 것조차도 매너 없는 행동으로 여겨진다. 분위기에 휘말려 ‘용서했다’고 말하고 나면 나에게 상처를 줬던 사람에게 또 당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상처 받은 기억은 깨끗이 정리되지 않는다. 그 기억에 딸린 감정도 마찬가지다. 감정이 남은 채 남을 용서하는 건 나를 위한 일도, 남을 위한 일도 아니다. 용서를 해야 내가 편해진다고들 하는데, 그 감정을 깨끗이 지우는 게 과연 가능할까?


진정한 용서는 현자들의 영역이다. 우리처럼 일상생활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게 목표인 평범한 사람들은 굳이 그 어려운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용서를 포기했다.


하지만 과거를 흘려 보내긴 해야 한다. ‘흘려보내다’의 사전적 정의는 ‘주의 깊게 듣지 아니하고 지나쳐 버리다’이다.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과 감정, 그 일로 인한 영향을 부정하지는 않되 현재와 미래를 망치지 않도록 관심을 덜 줘야 한다.


나는 한때 상처였던 기억과 사람들을 자주 떠올리며 제대로 된 복수를 꿈꿨다. 원수를 잊지 않기 위해 곰의 쓸개를 핥고, 잠도 장작더미 위에서 잤다던 오나라의 왕자처럼 비장했다. 그들을 용서하지 않기 위해 과거를 계속 붙잡았다. 나쁜 기억을 주기적으로 소환하지 않으면 결국 그들을 용서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잘못 생각했다.


용서는 남을 위한 일이 맞다. 가해자가 한 잘못을 피해자에게 허락받아 마음의 무게를 떨쳐 버리는 일이다. 그러나 과거의 일을 흘려 보내는 건 나를 위한 일이다. 과거를 잘 흘려 보내지 않으면 현재의 발목을 잡게 할 수도 있다.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글쓴이의 딸은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했다. 글쓴이는 점점 욕심이 생겨 공부를 더 열심히 하라며, 딸을 재촉하고, 때리며, 욕도 했다. 똘똘했던 딸은 결국 서울대학교에 붙었다.

하지만 딸은 입학 후 학교에 가보지도 않고 휴학을 했고, 과외를 하면서 원룸 보증금을 마련해 독립했다. 그리고 서울대 자퇴를 결심한다. 


서울대를 포기하는 자기 인생이 아깝지만 엄마한테 복수를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했다. 서울대 붙고 나서부터 자기를 사랑해준 엄마가 너무 역겨워서 꼭 그렇게 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딸은 제대로 된 복수를 위해 자기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기로 한다. 나 또한 내가 잘 되는 게 엄마를 위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자기파괴적인 행동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잘되길 바라면서도 잘 안 되길 바라는 그 이중적인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절교를 결심한 이상 엄마는 과거가 되었다. 이제 남이 된 과거의 엄마를 고통스럽게 하기 위해서 현실의 나를 망치면 안 된다. 엄마가 서울대 자녀들 둔 부모라는 타이틀을 얻기 위해 딸을 희생시켰듯, 딸도 자신의 복수라는 목적을 위해 자기자신을 희생시키는 꼴이다.


엄마와 딸은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이득과 손해를 공유한다. 엄마가 로또에 당첨되면 내가 상속받을 수 있는 유산이 늘어나고, 엄마가 사기라도 당하면 그 피해가 나에게까지 미칠 수 있다. 


엄마에게 적극적으로 보복하는 건 나의 상처를 위한 게 아니다. 과거의 일을 흘러가게 냅두는 건, 엄마를 용서하거나 나의 상처가 안중에도 없는 비굴한 행동이 아니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 나를 위한 일이다. 현재와 미래인 내 삶에 집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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