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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잼써 Feb 06. 2024

쉽게 공감받을 수 없는, 엄마에게 받은 상처

화목한 그들은 알지 못한다

나이가 들면서 흔해 빠진 이야기가 피부에 와닿는 걸 경험하는 순간이 생긴다. 대충 그렇겠거니 건조하게 받아들였던 남의 이야기들이, 생생한 나의 이야기로 들어오는 순간.


어릴 때는 명언 같은 걸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경험을 자주 하다 보니 현자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전혀 이해되지 않는 명언들도 무조건 말도 안 된다며 비난하거나 내치지 않게 되었다. 언젠가 저 이야기도 내 이야기가 되는 날이 올까?라는 생각이 들어 말을 아끼게 되는 것이다.


여러 명언들이 와닿지만, 그중에서도 현실에서 자주 체감하게 되는 말이 있는데, 바로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이다. 


새로운 운동을 시작해 볼까 하는 생각을 하면, 그동안 보이지 않던 체육 센터들이 눈에 들어온다. 오래 살던 동네의 자주 오가는 골목을 걸었는데도, 오픈한 지 꽤 오래 된 센터들을 그제서야 발견한다.


여기에도 요가 센터가 있었네. 

여성 전용 필라테스장이 꽤 크구나. 

세상에 격투기 체육관이 이 근처에 있었잖아?




마치 이 동네가 운동에 미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도 되는 것처럼 체육 센터들이 그렇게 많아 보일 수가 없다.


새로운 취미를 가져보려 했을 때는 이 동네가 흥이 넘치는 사람들만 모여 사는 것 같았고, 글쓰기를 시작할 때는 작가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100만 명은 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런데 아는 만큼 보이기도 하지만, 아는 만큼 공감도 할 수 있다.


나는 어릴 때, 엄마에게 받은 상처와 아픔을 남들에게 기꺼이 이야기하곤 했다. 솔직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위로와 공감을 받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는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었다.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 특히 남의 아픈 이야기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아픈 이야기도 잘 꺼내지 않았다. 그게 남에게 약점이 될 수 있어서든,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든 저마다의 이유가 있겠지만 확실한 건 대부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오픈하는지 감이 없었다. 그래서 요즘 흔하게 하는 TMI(Too Much Information; 알고 싶지 않은 부분까지 너무 깊이 이야기했음을 말한다)를 남발하고 다녔다.


그렇게 남들이 싫어할 만한 짓을 감내했지만, 그렇다고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엄마를 기준으로 생각했다.


보통의 자식들은 자기가 했던 객관적인 잘못 때문에 혼났다. 혼나는 과정에서 체벌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납득할 만한 수준이었고, 그렇다 하더라도 엄마가 자식을 사랑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런 걸 전제로 깔고 있었기 때문에, 철 없는 딸이 아직도 엄마의 고마움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 정도로 받아들일 뿐이었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부터 나는 굳이 엄마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 않았다. 엄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정도로만 이야기를 했다. 엄마와 사이가 좋은 척하는 건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유일하게 공감을 받았던 경험이 있다. 바로 나와 비슷한 처지였던 친구 어머님이었다.


친구 어머님도 나처럼 엄마에게 훈육이 아닌 이유로 맞았고, 나처럼 엄마의 존재 자체에 공포를 느껴 벌벌 떨었으며, 이제는 연락을 하지 않는 상태였다.


엄마가 이랬다, 저랬다 하며 일러바치듯 한 것도 아니었다. 짧게 이야기해도 깊이 아셨다. 그냥 한마디로 척하면, 척 아는 거였다.





자기가 겪지 않은 것은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제대로 된 이해가 없으면 공감도 어렵다. 다들 자기 세계의 기준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자기의 아픔만 공감한다.


층간소음으로 이웃을 살해했다는 뉴스를 보면, 가해자를 옹호하는 댓글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살해를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 “층간 소음이 얼마나 심했으면” 같은 이야기를 한다.


층간 소음을 겪은 사람과 가족을 살해 당한 사람 중 당연히 후자가 더 마음 아플 걸 머리로는 알 텐데 말이다.

층간 소음은 ‘본인이 겪어 봤기 때문에’ 그 어려움을 생생하게 알 뿐이다. 자기가 겪은 아픔만 알 수 있다. 어려운 사람들이 이웃을 더 많이 돕는다는 것도 같은 결일 거다.


이런 이유로 엄마에게 상처 받은 사람은 공감을 받아본 적이 별로 없을 거다. 남자친구가 남의 깻잎을 떼어주는 것만으로도 불같이 타올라 공감 받는 것과 비슷한 경험은 정말 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게 내 아픔이 정당하지 못하다거나, 내가 너무 엄살이 많다거나, 이기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남들은 알지도 못하는 아픔을 겪었을 뿐이다.


공감 받지 못해도, 내 아픔에 의문을 갖지 말자. 이제는 잊혀졌어도, 지금에 와서 큰 의미가 없더라도. 나는 상처를 받았고, 아팠다. 그걸 부정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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