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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아 Jul 15. 2020

[주역에세이] 권태기 부부의 사랑 유지력, <뇌풍항괘>

권태기를 넘어 백년해로 할 수 있는 '유지력'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얼마 전에 남편이랑 같이 걸어가는데 그 인간이 내 손을 잡는 거야. 화나더라?


자살소동까지 벌이며 부모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결혼한 친구의 말이었다. 그녀의 뜨거운 시절을 아는 나로서는 '남편의 손길이 화난다'는 말에 어리둥절 할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과 연애를 하고 싶다는 걸 보면 아직 설레는 마음, 연애 세포는 살아 숨쉬는 거 같은데 그 대상이 지금의 남편은 아니라니. 



결혼한 지 좀 된 선배들은 말한다. 이젠 ‘형제애’로 살아간다고. ‘형제애’는 ‘의리’는 느낄 수 있을지언정 부부관계에 쓰일 때엔 설레임, 가슴 떨림 등은 느낄 수 없는 무지막지한 말이다. 얼마나 많은 권태기 부부들이 이러한 감정을 느끼면 부부 간 ‘도원결의 형제애’를 콘셉트로 한 광고가 나왔을까. 결혼은 과연 사랑의 무덤인 걸까. 이 모든 의아한 감정은 내가 미혼일 때 품었던 것이다. 


나도 이제 결혼 10년이 지났고 주말 부부를 만나게 되면 이렇게 말하게 되었다. 


3대가 복을 쌓으셨군요.


비록 농담조였지만 그 말을 내뱉은 나 스스로에게 놀랐다. 어랏? 내가 왜 이런 말을 하지? 모든 부부의 시작이 그랬듯이, 우리 역시 뜨거웠는데! 우리는 자영업을 하고 있어 함께 일을 하기 때문에 24시간 365일을 내내 같이 지내며 ‘일심동체’를 넘어선 ‘암수동체’라고 할 정도의 부부애를 과시하던 우리였다. 


일상으로 사랑이 무디어지면 안 된다는 남편 뜻에 따라 매주 목요일은 쉬고 데이트를 했다. 우리의 목요 데이트는 7-8년 간 지속되었다. 그렇게 공들인 우리 관계도 언젠가부터 시들어지고 틀어지기 시작했다. 모처럼 쉬는 날, 각자 따로 만나고 싶은 사람, 하고 싶은 일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어느 순간 주말부부를 보며 3대 복을 운운하게 되는 나를 보았다. 머지않아 나도 ‘부부간 형제애’를 입에 올리게 될까? 벌써 권태기가 온 걸까? 그나마 '전생의 원수'보다 '형제애'를 입에 올리는 것은 화목한 부부인 걸까. 신혼의 뜨거운 계절이 지나간 중년부부에게 필요한 괘가 있을까? 주역의 31번째 괘, ‘택산함괘’가 젊은 연인의 뜨거운 교감을 뜻한다면, 바로 뒤 이은 32번째 괘, ‘뇌풍항괘(雷風恒卦)’는 부부간의 도(道)를 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뇌풍항’의 괘상을 보자. 아래에는 ‘바람’을 상징하는 ‘손괘(☴)’가, 위에는 우레를 상징하는 ‘진괘(☳)’가 있다. ‘우레’와 ‘바람’이 부부간의 도를 말한다고? 아아 슬프다. 꼭 붙어 있는 한쌍의 원앙새나 잉꼬가 아닌 발톱을 세운 독수리와 으르렁대는 사자가 떠오르는 괘상이다. 하늘에서는 천둥번개가 치고 땅에서는 바람이 휘몰아치는데 괘명은 '변(變)'이 아니라 '항(恒)'임에 주목하자.     


뇌풍항괘의 하늘은 어둡고 묵직할 거 같다. 거기에 천둥 치고 바람이 휘몰아치는 광경을 마음속에 떠올리자니 사랑과 전쟁이 따로 없다. 역시 결혼생활을 유지한다는 것은 먹구름 속 난리통 같은 것일까? 부부의 인연을 맺고 권태기를 넘어 백년해로할 수 있는 '유지력'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괘상을 다시 한번 보자. ‘바람’이 아래에 위치한다. 바람(☴)을 상징하는 괘의 이름은 ‘부드러움’과 ‘공손함’을 뜻하는 손(巽) 괘이다. 누구나 자유로운 영혼인 때가 있었다. 하지만 ‘사랑’에 눈이 멀어 오직 그 사람만 보고 결혼을 한다. 결혼을 한 순간, 여러 역할과 책임들이 군식구처럼 딸려온다. 마냥 싱글이던 시절의 자유를 그리워만 할 수 없다. 자유롭게 떠돌던 바람은 우레 밑에 ‘공손하게 머무르는’ 손괘가 된다. 


바람이 머무는 곳, 그 위에는 우레(☳)가 있다. 주역에서는 사물을 진동케 하며 위세를 떨친다는 뜻의 진(震) 괘로 표현된다. 위세를 떨치는 우레 밑에 바람이 머물고 있다. 그런데 이런 형상이 항상(恒常)을 뜻하는 ‘항괘(恒卦)’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멈춰있는 ‘항(恒)’이 아니다. 변화무쌍한 인생 속에서 부부 간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에너지가 공급되어야 한다. ‘유지력’이 뒷받침 되어야 비로서 ‘항(恒)’이 가능한 것이다. 그 유지력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올 해 회혼을 맞이하게 된 이어령, 강인숙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1958년 결혼한 동갑내기 부부인 그들은 60년을 함께 산 비결로 ‘따로 서로’를 언급한다. 부부를 일심동체로 생각하면 관계가 어긋나며 ‘따로 서로’를 잘해야 회혼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부부가 각자 개성을 찾으면서도 함께 할 수 있는 비결이 거기에 있다고 한다.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사고방식으로는 권태기를 이겨낼 수 없다. 무너질 리 없는 하늘로서의 남편, 꺼질 리 없는 땅으로서의 아내. 주역은 그런 '변화 없음'에서 ‘항(恒)’을 말하지 않는다. 부부는 '전력'과 '풍력'으로 가정이라는 공동운명체의 항해를 꾀하는 서로 다른 에너지의 결합체이다. 아내와 남편은 각자의 에너지를 품고 계속 변하는 존재이다. 불평 불만이 아닌 서로의 입장과 상황을 이해할 때 비로소 부부 간의 ‘유지력’이 생긴다.      


'사랑'이 부부의 연을 맺게 하는 '추진력'이라면, '정'은 그 관계를 지속시키는 '유지력'이 된다. 인생을 함께 살아가는 반려자의 변화를 인정하고 수용하며 함께 나아가야 한다. 유지력은 바로 그 지점에서 힘을 얻음을 뇌풍항괘는 암시하고 있다. 


주역은 ‘변화’를 말한다. 사랑이 변하니? 사랑이 움직여?하며 뜨거운 감정의 변화를 서운해 할 것이 아니다. 그런 대응은 부부 간의 유지력에 하등 도움이 안된다. 상대방이 변화와 나의 변화를 인정하며 함께 힘차게 나아가자. 천지를 울리는 우레와 바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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