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술이 과하면
-51XX 흰색 포터 더블캡 차주 되시니껴?
-예, 그런데요.
-어제 제 차를 박고 그냥 가셨더라구요.
그냥 가셨더라구 그냥. 주차할 곳이 마땅찮아 옛장터에 차를 대고 일 끝나 와보니 뒷휀더와 리어램프가 깨져있다. 깨진 램프조각을 줍는데 쨍그렁 마음도 깨지더라. 아아, 수영장만큼의 사과즙을 팔아도 갚을까 말까한 할부가 남은 차라구요.
그렇지, 블랙박스가 있었지. 출고할 때 서비스로 달아준 거라 잊고 있었네. 그런데 설라무네 이걸 어떻게 보는 것이냐. 메모리를 빼서 PC에 읽혀야하니까 리더기가 있어야하는구나. 리더기를 사자면 읍내 하나뿐인 컴퓨터 가게에 가야하는데 하아, 벌써 해 떨어졌네.
날 밝기를 기다려 리더기를 사고 프로그램을 깔고 드디어 개봉박두. 옳거니, 검은 잠바를 입은 사람이 식당에서 혼자 나와 포터를 타는구나. 그냥 앞으로 가도 되련만 후진은 왜 하는 것이냐. 쿵. 와장창. 얼라리여, 그냥 가시네.
영상이 있으니 경찰서에 신고만 하면 다 해결되는 것이렷다. 가만가만, 그런데 저 양반 꼭 전지하다 온 행색인데. 차 가는 방향을 봐서는 그냥 동네 사람인데. 동네 사람이기만 하면 다 형님이고 아재고 할배인데. 그렇다면 뺑소니 신고는 너무 가혹하지.
그래서 식당에 가서 물었다. 어제 점심 때 혼자 와서 식사한 양반이 누구냐고. 친절하게 전화번호를 가르쳐주시네. 부모님께 여쭈니 아는 양반이란다. 옛장터에서 만났다.
-연락처라도 남겨놓고 가셔야지, 그냥 가시면 우예니껴.
-박은 줄 몰랐네.
-차가 쿵했을 낀데 우예 몰랐니껴.
-술에 취했었거덩
아아. 그러셨구나. 낮술이 과하셨구나. 해는 짧고 종일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전지를 하노라면 막걸리 생각이 간절하셨을 터. 몸은 늙고 술에라도 취하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농사이긴 하지요마는. 그렇더라도 이 양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