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한기가 끝나간다. 아아.
<보온병>
해군으로 복무했다. 군함을 탔고 레이더병이었다. 함포를 쏘면 함 전체가 거대한 울림통 같았다. 쿠웅쿵. 작전실 천장의 쥐똥이 함포소리와 함께 우수수 떨어지곤 했다. 얼마나 큰 포탄인 것일까. 레이더를 봐야했으므로 발포는 볼 수 없었다. 얼마나 큰 포탄인 것일까. 그래서 보온병을 주문했다. 백년 전통의 아웃도어 명가 STANLEY 클래식 750ml 보온병.
<자전거>
아버지는 만능탈것수리점이랄까, 자전거, 리어카, 오토바이, 경운기를 고치셨고 철공소도 겸하셨다. 어려서부터 자전거 빵구를 때우며 용돈을 벌었으되 단 한 번도 새 자전거를 갖지 못했다. 여기서 안장, 저기서 바퀴식으로 못쓰는 자전거 부품을 뜯어다가 방학 때마다 내가 만들어 탔다. 엊그제 도선생이 아내와 아들이 함께 타는 자전거를 가져가시는 바람에 자전거를 새로 주문했다. 주문하면서 그렇게 내가 뜯어다 만든 자전거를 방학이 끝나 서울로 돌아가자마자 금방 중고로 팔던 아버지가 생각났다. 생각해보니, 아이참, 아부지요!
<생두>
새벽 4시 깨자마자 빈 속에 마시는 커피 한 잔은 중년의 촌부가 그래도 잘 살고 있는 건지 되묻게 하는 효과가 있다. 해장은 덤. 원두를 구할 곳이 마땅찮아 생두를 볶아먹은 지 십 년. 혀가 까탈스러우면 생이 고달프댔지. 비싼 COE 생두를 가당찮게 주문하면서 스스로 변명하자면 농사꾼도 가끔은 멀쩡한 거, 팔다 남은 거 말고 남보기에도 멀쩡한 걸 먹고 싶다. 그래봤자 이 아름다운 커피를 생산한 엘살바도르 농부 Ignacio Gutierrez씨에겐 반값도 안돌아가겠지만.
<중식칼>
어머니는 만능식당이랄까, 치킨집, 해물탕집, 짜장면집, 함바집을 하셨다. 짜장면집을 오래하셨는데 그 덕에 나는 식칼이라면 당연히 중식칼인줄 알았다. 주방장 아재는 양파를 탕탕탕 가볍게 썰고나서 늘 넙적한 칼을 도마에 탁 꽂아놓곤 했다. 백선생덕에 중식칼이 다시 환기되었을 때부터 괜찮은 중식칼이 갖고 싶었다. 적당한 무게와 듬직한 넓이가 주는 느긋함. 도루코나 장미칼 말고 괜찮은 중식칼. 며칠을 고른 끝에 주문하려고 보니 해외직구. 평생 처음 하는 직구가 TV도 청소기도 아닌 중식칼.
보온병, 자전거, 생두, 중식칼을 주문하느라 며칠을 끙끙거린 건 어떻게든 입춘 지나 농한기가 끝나는 걸 외면하고픈 농부의 혼신을 다한 딴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