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내가 함께한 낙하와 비상
심리 상담사인 엄마에게 이틀 전 메시지 하나가 왔다. 임상심리사 1급 필기시험 불합격 소식이었다. 1년에 한 번 있는 시험인지라 올해 합격을 못 하면 다음 시험을 보기 위해 내년 하반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매일 밤 혼자 졸린 눈 부여잡고 열심히 공부하던 엄마의 모습을 알고 있기에 동정 어린 답을 보냈지만, ‘내년에 다시 보면 되지’라는 쿨한 그녀의 대답에 피식 웃어버린다.
나의 ‘엄마’는 일반적인 ‘엄마’는 아니다. 담아내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다큐 영상을 만드는 사람이었고, 여행이 가고 싶으면 혼자 제3국으로 홀라당 떠나버리는 그녀였다. 내 육신은 생물학적 요소들이 만들어낸 피조물이라면 그 안에 들끓는 생명력을 넣은 건 엄마의 역할이 9할이었다고 볼 수 있다.
엄마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몇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독립심을 길러주겠다는 목적으로 동생과 나를 단둘이 일본에 보낸 적이 있다. 동생을 데리고 아무 문제 없이 일본에 가기 위해 하루 종일 인터넷으로 ‘비행기 타는 방법’을 찾아보았고, 일본에 사는 고모 집을 찾아가기 위해 도서관에 가서 일본어 기초 회화책을 두 손 무겁게 빌려오기도 했다. 수화기 너머로 “얘들 절대 도와주지 마세요. 아가씨”라며 단호하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얄밉기도, ‘내가 진짜 딸이 맞긴 할까’ 원망 섞인 생각도 했었더랬다.
다음 에피소드는 초등학교 6학년 때로 돌아간다. 정확히 어떤 이유 때문인지 기억 나지 않지만, 학교에서 말썽을 피워 크게 혼난 적이 있다. 엄마가 나에게 회초리를 든 처음이자 마지막 체벌이었다. 그 후 주말, 엄마가 부엌에서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무슨 일인가 하고 가니 상부장 아래 붙어있던 얇은 주방 라디오에서 “다음 사연입니다. 광주에 사는 신경희 님의 편지인데요.”라는 음성이 흘러 나왔다. 신경희. 엄마 이름이다. ‘광주에 사는 신경희’면 엄마인 게 분명했다. DJ 김창렬의 목소리로 엄마가 보낸 편지가 읊어졌다. “은아. 엄마는 은이가 싫어서 혼낸 게 아니야. 엄마는 은이가 바르고 곧은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어. 항상 사랑한다.”라는 말로 끝난 편지였다. 평소에 하지 않는 낯간지러운 말 때문에 고마운 대답도 따뜻한 포옹도 못 한채 멀뚱히 서서 고장난 표정을 지으며 웃고 있는 엄마를 쳐다만 봤다. 그래도 여전히 그날 부엌 창으로 들어오는 늦은 오후의 강한 주황빛 햇살이 두 눈을 꼭 감아도 선명하고 따뜻하게 그려진다. 그렇게 엄마는 인생의 절반가량 그녀만의 방식으로 당신이 가진 쉬이 식지 않는 마음을 딸에게 끊임없이 일러주었다.
글을 써 내려가며 흩뿌려져 있던 우리가 함께한 낙하와 비상을 모아 보니 제법 두꺼운 종이책이 되어있다. 어린 나를 대신해 써 준 촘촘한 서문 덕분에 지금 나는 별 가득한 밤하늘처럼 세상을 반짝이게 볼 수 있고, 높은 온도의 사랑을 할 수 있고, 정해진 것 없이 일상을 힘껏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저 기승전결 없는 나와 엄마의 다음 페이지는 새롭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