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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Apr 05. 2020

나의 단편영화

여기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평범한 어린 시절이 있다.

4월은 내게 많은 것을 안겨 준다. 이를 테면, 봄의 향기와 햇살, 눈부시게 흩날리는 꽃잎, 사람들의 미소. 이런 따스한 장면을 마주칠 때면 모든 순간이 애틋해지곤 한다. 세상의 빛을 본 과거의 한 시점부터 지금까지의 필름을 되감는다. 곧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화가 시작된다. 감독도 관객도, 어떤 자막도 없는, 오로지 내 감정과 단상의 조각들로 이어 붙인 시간. 여기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평범한 어린 시절이 있다. 기억의 대부분을 차지한 건 아마도 사랑이리라. 주인공이 가장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안온하게 보냈던 날들이 펼쳐진다. 가끔은 까진 무릎이 더디게 아물 기도 하고 마음의 생채기가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상상 속 스크린이 희미해져도 멈춤 버튼을 누르지 않는다. 슬픈 기억이나 행복한 말들이 유리병에 가득 차면, 영화는 비로소 막을 내리게 될 테니까.





볕이 좋은 오후의 동화. 도로에 심어진 벚나무가 사람들의 감탄사를 재촉한다. 엄마는 소녀처럼 환한 미소를 짓고 딸은 차를 세워달라고 애원한다. 아마도 지금쯤, 다른 도시에는 엄청난 인파가 생겨나고 있겠지. 그러니까 비밀 정원이 있다는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정자가 있는 쉼터, 봄기운이 가득한 길에 멈춰 서로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엄마, 우리 하트 찾으러 갈까?” 하트 모양의 구름을 만들었던 벚나무 가지와 잎이 떠올라서 느릿느릿 걸음을 옮긴다. 엄마는 황홀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모습에 행복해졌다. 흘러간 스물네 번의 봄엔 어떤 향이 남았을까. 우리가 봄에  벚나무라면, 엄마는  나무의  배쯤 되겠지. 그녀의 나이테에는 긍정과 지혜가, 기쁨이 깃들어 있으리라. 오랜 시간이 른 뒤, 우리가 만날 숲을 상상한다. 비바람에 의연할  아는 강인한 나무를 닮아 있기를, 누구에게나 따뜻한 정원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기를 바라면서.


평화의 다리를 건너 그네를 타고 조용한 학교를 산책한다. 별빛 아래 친구와 함께 걸었던 날이 반짝하고 스친다. 작고 어렸던 우리는 어느덧 서로의 인생을 멀리서 응원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회상을 멈추고 다시 벚나무길로 돌아간다. 황홀은 깊이 이어져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복숭아나무와 장작 더미, 호수를 독차지한 연둣빛 버드나무. 자연의 한 부분이 금세 마을을 고요로 물들인다.


아빠에게 걸려온 전화에 엄마는 귀여운 거짓말을 한다. “여기 동화호! 오늘 영이네 민박 오시는 손님 두 분이 구경하고 싶다고 하셔서. 금방 갈 거야!” 그 손님이 우리라는 걸 안 순간, 아빠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릴 게 분명하다. 안 봐도 비디오. 졸지에 공범이 된 남자와 나는 키득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얼른 집에 가서 몰래카메라를 끝내야지. 흐흐.




토요일, 앞마당의 살구나무와 수선화, 작고 사랑스러운 꼬물이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집을 나선다. 할머니가 챙겨준 반찬을 가득 품에 안은 채. 익숙한 마을을 지나 봄이 있는 곳에 도착한다. 감히 형언할 수 없는 정취, 그리고 투명한 소리가 잠든 세포들을 깨운다. 찬바람이 불었지만 산책을 이어가기로 했다. 들판 아래 뿌리내린 키 큰 나무 옆에는 늘어진 벚나무 가지가 있다. 형형색색의 텐트와 사람들도 하나의 풍경이 되어 있다. 찰나의 순간, 꿈을 꾼다. 머지않아 캠핑을 시작하는 내 모습?



일기예보가 맞다면, 당분간 비는 내리지 않을 거다. 그럼 우리는 어느 때보다 더 긴긴 봄에 머물게 되겠지. 꽃비를 맞고 콧노래를 부르면서. 그런데 자꾸 눈물이 났다. 아름다운 시간이 쏟아지거나 강가 위로 부서지는 빛에 더 가까워지면, 괜히 아빠가 생각나서. 당신도 여기에 오고 싶었을 텐데. 이 찬란한 봄의 향연을, 사랑이 있는 순간을 오롯이 누리고 싶었을 텐데.


눈물을 닦고 차로 후퇴한다. 이번에는 차창 너머로 흔들리는 전경을 마음에 담는다. 긴 침묵을 깬 건 엄마의 목소리. “지영아, 너 울었어? 얼굴이 왜 그래.” 동생은 모르는 내 눈물 자국을, 엄마는 안다. 그녀는 늘 가장 먼저 알았다.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말해보지만, 떨리는 목소리는 깊은 슬픔을 숨겨주지 않았다. 결국 눈물바다를 만든 딸이 말한다. “아쉬워서 그래. 저렇게 예쁜 걸 나 혼자 보는 게.” 그리고 입을 다문다. 더 많은 글자가 엄마를 아프게 할까 봐, 나를 더 울게 만들 까 봐.

하지만 이제는 한숨을 거두고 더 많이 사랑할 것.

봄은 짧으니까,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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