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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Apr 19. 2020

좋은 계절에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소중한 인연들이 건넨 아름다운 말을 잊지 않을 것.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는 아이는 말한다. “이번엔 엄마가 타. 내가 밀어줄게.” 이제 네 살이 되었다는 작은 소녀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힘껏 그네를 민다.


바람이 불고 스물다섯 번째 생일을 맞는다.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나 금요일 저녁에 갈게.” 문득 이번 생일은 집에서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통화를 마쳤을 때, 당신은 말한다. “일찍 가서 저녁 차릴까? 이제 챙겨 드릴 나이가 됐으니까.” 그 말에 코끝이 얼얼해졌다.








아침은 양상추와 오렌지로 만든 샐러드. 화면에 뜨는 기분 좋은 문장에 산뜻한 하루를 시작한다. 마음만은 초를 불고 춤추고 있다는 친구의 연락. 축하의 말은 미래의 약속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서로를 궁금해했던 날들을 차근차근 꺼내는 일로 하루를 채우게 되리라. 반가운 알림이 계속되고 소식이 뜸했던 이와 소중한 인연들의 글자가 봄의 조각으로 차곡차곡 쌓인다. 어쩌면 여러 해 동안 전해진 그들의 문장이 나를 일으켰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마음 상자에 모인 언어를 오랫동안 기억해야지. 잊지 않고 감사를 전해야지. 더 많은 사랑을 담아서.


빈을 만난다. 그는 에어팟으로 내 두 귀를 감싸더니 영상을 틀어준다. 배경음악은 내가 사랑했던 ‘기념일’. 여기에는 우리가 만난 900일의 순간들이, 말로는 절대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들이 담겨 있다. 곧 울음이 터져 나온다. 사진마다 새겨둔 글자와 당신의 정성에, 그리고 우리가 보낸 따스한 날들에 마음이 일렁인 것. 당신의 어깨에 기대어 작게 속삭인다. “고마워.”


오전 열 시의 성심당. 갓 구운 빵 냄새가 허기에 더해진다. 들뜬 마음으로 접시를 들자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아바의 댄싱퀸. 여고 시절 사랑하는 친구와 함께 부른 추억의 팝송을 듣고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가게에 있는 손님들을 피해 작은 축제를 연다. 규칙은 간단하다. 리듬에 맞춰 춤을 추거나 고개를 흔들기.


-You can dance, You can jave, Having the time of your life.







오후 한 시, 여고 때 내 집처럼 드나들었던 떡볶이 가게. 자주 먹던 메뉴를 주문한다. 떡볶이와 쫄면을 먹는 동안 감탄사를 얼마나 내뱉었는지. 아마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맛이 감탄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으리라. 그렇게 배를 채운 후 학교로 향한다. 언덕과 벚꽃길, 학생들이 그린 벽화를 지나 그리움이 있는 곳에 닿는다. 익숙한 냄새와 빛이 오래된 기억을 꺼낸다.


나를 사랑으로 가르쳐주신 선생님을 뵙고 그간의 삶을 나눈다. 그녀의 회상은 길게 이어진다. 내가 영어를 열심히 공부했다는 것, 야간 자율학습 대신 피아노를 쳤던 유일한 학생이었다는 것, 그리고 땡땡이를 쳤던 어느 날까지. 나의 오래된 기억을 타인에게 들을 수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누군가 내 모습을 잊지 않았다는 사실 만으로 마음이 뜨거워지곤 하니까. 애정이 깃든 눈빛과 아늑한 분위기는 나를 지난 시절로 데려간다. 야자를 빼먹고 몰래 떡볶이를 먹으러 나갔던 그때, 친구와 학교가 인생의 전부였던, 홀로 음악실을 지켰던 긴 밤들, 그리고 존경하는 선생님들과 가치 있는 배움의 시간. 그런 순간들을 떠올리며 추억의 공간을 더듬는다.


“남자 친구 좋다고 너무 손 꼭 잡고 다니지 말고. 학생부로 넘길 테니까 알아서 해!” 선생님은 여전히 내가 어린 고등학생처럼 느껴지시나 보다. 철없는 제자는 웃으며 반항한다. “꼭 잡아야지!”







집에 도착한 저녁 무렵. 트렁크 가득 엄마의 사랑이 쏟아진다. 프리지아와 빨간 장미, 예쁜 목걸이, 떡으로 만든 케이크, 레이스가 달린 투피스까지. “이게 다 뭐야? 나 반 오십 된 기념 선물이야?”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엷은 미소를 짓는다. 밀려드는 행복감 뒤로 울컥한 마음이 겹친다. 이제껏 받기만 한 게 어쩐지 미안해져서.  



꽃다발과 작은 신발을 품에 안고 마음을 졸였던 아빠의 젊은 시절과 어린 엄마를 떠올린다. 엄마는 스물다섯, 지금 내 나이에 결혼을 했고 그다음 해에 엄마가 되었다. 그녀의 세상에 얼마나 많은 파도가 쳤을까. 또 얼마나 많은 언덕을 넘었을까. 하지만 나는 안다. 더없이 찬란한 시절이,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었다는 것을.



빈은 고기를 굽고 나는 채소를 손질한다. 아빠는 골프를 치고 엄마는 그의 옆에, 막내는 인터넷 강의를 듣는다. 뒤늦게 집에 도착한 둘째는 당근 케이크를 접시에 담고 재료를 맞춰 보라고 소리친다. 그러다 턱걸이를 하기도 하고 생일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이 장면을 기억하기로 한다. 평범한 순간은 곧 그리움이 될 테니까.



마음껏 향유하고 사랑하고 또 축복받으며 보낸 긴긴 하루, 소중한 인연들이 건넨 아름다운 말을 잊지 않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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