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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연 Nov 22. 2021

"그렇게 충만했던 시절은 또 오지 못할 거야"

영화 <윤희에게>

 헤어지고도 계속해서 찾아오는 전남편, 어렸고 반짝거렸던 윤희를 옭아맸던 조그만 도시, 가슴 뜨겁게 사랑했던 준, 그런 준과 함께였을 한때.


러닝 타임 내내 영화는 윤희와 준의 재회 장면을 향해 달려 나가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단계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쩐지 이 영화는 이별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닌가 싶어 진다. 과거 자신을 옴짝달싹 못하게 붙잡고 있던 어떤 것들과 이별하는 이야기. 영화 ‘윤희에게’에 대한 이야기이다.


 새봄의 아빠는 윤희와 자신의 딸인 새봄에게 말한다. 너네 엄마는 옆에 있는 사람을 좀 외롭게 한다고. 떨쳐내지 못하고 짊어진 채 살아가는 기억들이 많아, 자신의 외로움도 돌볼 수가 없는 사람이 어떻게 주위의 외로움까지 어루만지겠는가.


딸이라는 이유로 오빠에게 밀려 하고 싶었던 사진 공부도 하지 못했고, 사랑했던 사람과는 영영 이별해야 했으며, 집에서 정해주는 짝을 만나 살아가는 윤희의 삶. 사방이 1m인 방에 갇혀서 평생을 살아가는 것만 같은 답답함이 느껴져서 영화를 보는 내내 괜히 가슴 께를 툭툭 쳤다. 더 갑갑한 건 이게 영화적 과장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시대 여자들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마치 타고난 것처럼 강요 당하던 침묵이었다.


 이런 윤희를 새봄이 구한다. 엄마인 윤희가 과거에 짓눌려 사는 동안, 그 속에서 자라난 새봄은 눈 밝은 딸이 되어버렸다. 자기 주변에 동그라미라도 그려놓은 양, 그 밖으로 벗어나지 않는 윤희를 저 멀리 홋카이도의 오타루까지 끌고 갈 수 있는 기개와 지혜는 새봄만 가지고 있다. 엄마에게 온 편지를 그냥 지나치거나, 곧바로 엄마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옛 연인과 재회할 수 있도록 환경적 설계를 해 둔다. 똘똘한 새봄인데도 괜히 마음이 시큰거렸다. 필요 이상으로 빨리 커버리는 어린애들은 화면 밖 사람의 마음까지도 짠하게 하는 구석이 있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부모의 이혼 과정을 지켜보고 엄마와 살겠다고 결심하고, 엄마 곁을 지켰을 저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새봄을 보고 있노라면 아픈 확신도 함께 든다. 윤희는 새봄 덕분에 살아왔을 것이라고. 새봄 외에는 그 어느 것도 윤희에게 살 이유가 되어주지 못했을 것이라고.


 오빠, 전 남편, 생계, 고향 어느 것 하나 풀어내지 못한 채 주렁주렁 매달고 살아가던 윤희는 준과 그 시절 모두에 대한 이별을 고하고서야 자신의 현실을 돌아볼 수 있게 된다. 준에게 차마 보내지 못한 편지에서 윤희는 말한다. 그렇게 충만했던 시절은 또 오지 못할 거라고.


 다시는 오지 못할 시절이라는 것을 문장을 통해 인정하는 순간, 그는 이미 떠난 시절과 다시 한번 완전히 이별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 시절에 대한 진정한 인정과 작별이야말로 현재의 삶을 온전히 살아가기 필수적인 절차일 것이다. 뒤이은 이별들은 앞선 이별에 비하면 차라리 쉽다. 윤희는 이제 새봄을 통해서가 아닌, 자기 스스로 자신의 생을 구하러 나섰으니까.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마저 윤희는 누구에게도 언성을 높이지 않고,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간다. 그런 윤희를 보며 화가 나도 성을 내지 않게 되기까지 얼마나 긴 세월을 참아왔을까 헤아려보게 된다. 그리고 윤희 또래의 여자들의 얼굴, 그보다는 조금 더 나이가 있을 우리 엄마와 이모들의 얼굴도 이따금 떠올려본다.


 한 시절에 대한 이별을 준과 윤희의 완전한 엔딩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한 시절에 대한 깨끗한 작별을 통해 둘은 새로운 충만한 시절을 만들어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때때로 어떤 이별은 진정한 재회를 위한 필수적 관문이기도 하다.


 이 영화 안에서 일어나는 단 하나의 재회가 있다면 그 재회는 윤희와 준이 아닌, 윤희가 잊고 산 지 오래되어 어디다 넣어뒀는지 조차 가물가물한 진짜 자신의 모습과 다시 마주하는 장면일 것이다. 돈을 모아 식당을 차려보겠다고 말하는 윤희. 새봄이가 그만 배우겠다고 말할 때까지 배우게 할 작정이라는 윤희. 한때는 모든 것들이 과거에 묶여 있었지만 이제는 고개를 들어 미래를 바라보는 윤희.


‘윤희에게’는 결국 이별에 관한 영화다. 사람과 사람 간의 이별을 넘어서, 한 시절과의 이별을 담고 있는 영화. 삶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분명히 해야 할 이별들이 있다. 어느 이별은 미래를 향해 있다. 윤희 앞에 펼쳐질 다음 장면은 어떤 것일까. 부디 지금까지의 장면보다는 더 많은 이해와 다정이 있기를, 윤희만이 윤희의 인생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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