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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려산의 여행 일기 Aug 07. 2024

권력

광통교


파묘

"신덕 왕후 강 씨의 묘'를 당장 사대문 밖으로 옮기고 석물들은 청계천 교각 공사현장으로 옮겨라, 또한 그 흔적을 남기지 마라."

태종은 아버지 태조가 사망하자 가슴에 맺힌 한을 풀기라도 하든 조선의 첫 번째 왕비였던 신덕왕후 강 씨의 묘를 파묘하기에 이른다. 



방석 세자가 되다

신덕왕후 강 씨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두 번째 부인이다. 당시 첫 번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 씨가 있었으나 조선 개국 전 사망하였기 때문에 공식적인 왕비는 신덕왕후 씨였다.

조선이 개국하고 신권정치를 주장했던 정도전은 차기 왕세자를 신덕왕후 강씨의 둘째 아들인 방석염두에 두고 신덕왕후 강씨와 밀약을 맺는다. 이 또한 태조의 의중과 같았다.

태조의 향처인 신의 왕후 한씨의 자녀들은 고려조의 가문들과 인척 관계를 이루어 새로 개국한 조선에서는 부담스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신덕왕후 강씨의 두번째 아들인 방석은 고려조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기에 새로운 나라에서는 외척이 권세를 누리거나 하는 일이 없다고 판단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을 지켜보던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조선의 3대 국왕인 태종이다.  사실 조선 개국에 가장 공인 큰 인물은 정안대군(훗날 태종)이다. 그는 아버지가 가고자 하는 길에 걸림돌이 될만한 인물들을 제거하여 길을 열어 주었고 정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계모와 아버지가 생존에 있는 상태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고 1392년 7월에 조선이 개국하고 그해 8월에 방석(의안대군)은 세자로 책봉된다.

방석이 세자가 되고 권력을 잡은 신덕왕후 강씨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조선이 개국되었다고 하지만 장성한 신의 왕후 씨의 아들들이 건재하고 있었고 특히 조선 개국에 공이 큰 정안대군(태종)은 신덕왕후에게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러한 불안한 마음속에서 정권을 잡은 신덕왕후도 세월의 흐름을 이길 수는 없었고 더 이상 세자 방석을 지켜줄 수 없었다. 정말 10년도 누리지 못하는 권력이 야속할 뿐이었다.




정릉의 유래 [정동]

결국 신덕왕후 강 씨는 조선 개국 5년째인 1396년  8월 13일 승하하고 덕수궁 인근의 정동에 묻히게 되고 태조는 이를 '정릉'이라 명한다.  사실 도성 안에는 릉을 조성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태조 이성계는 이를 밀어붙인다.  이후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태종 이방원이 정도전과 신덕왕후의 두 왕자를  살해하고 정권을 잡는다. 이에 분노한 태조는 왕위를 정종에게 양위하고 함흥으로 돌아간다.




도성밖 정릉 그리고 광통교

태종 8년(1408년) 태조 이성계가 승하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태종은 신덕왕후 강씨의 릉을 정동에서 파묘하여 미아리 (현재 성북구 정릉동)으로 이장을 하고 능호를 격하시킨다. 또한 봉분은 흔적도 없이 깎아 버리고 석물들은 청계천의 광통교를 보수하는 데 사용하였다. 

신덕왕후 강씨는 죽은 뒤에 자식들이 죽고 본인의 능이 파묘 되어 도성 밖으로 이장하게 된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고작 그녀가 누린 권력은 10년도 되지 않았다. 정말 허무한 인생다.


청계광장 초입에서 다리 하나를 지나면 두 번째 다리가 나온다. 바로 이곳이 파묘된 신덕왕후릉의 석물들이 다리 보수공사로 사용되었다.


광통교 석물 난간 기둥의 해태상도 세월의 흐름으로 부분 보수 된 흔적을 볼 수 있었는데 눈에 거슬려 보였다. 이렇게라도 복원을 해야만 하였을까?


광통교 위에서 잠시 생각에 잠긴 뒤 청계천 아래로 내려가 보았다. 튀르키예에 있는 지하궁전과 흡사한 느낌을 받았다. 튀르키예 지하궁전은 6세기 비잔틴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만든 물저장소인데 이곳의 석물들은 그리슨 신전에서 가져온 대리석 기둥과 메두사 머리 및 특이한 문양들이 있어 지하궁전이라 불린다.

광통교는 규모는 작지만 릉의 석물들이 다리 교각의 보수 석재로 사용하게 되니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청계 광장 쪽이 아닌 반대쪽 다리 기둥 2개에는 한문으로 글 새겨져 있었다. 왼쪽은 '경진지평"인데 장충단 공원에 있는 수표교 기둥에도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오른쪽은 '기사대준'인데 기사년에 대대적인 준설공사를 했다는 뜻이다.


                                             가운데 기둥에는 글이 새겨져 있지 않았다.


능침 석물을 보게 되면 보살상, 구름 문양, 당초 문양이 그려져 있는데 당시의 세공기술을 알 수 있어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왼족 사진의 하단 석면을 보면 거꾸로 되어 있는 그림 모양도 발견된다. 이를 보았을때 정릉의 석물들이 과거에 제대로 대우를 받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이 든다.


태조가 정릉을 조성할 때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석물들을 보고 있으면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신덕왕후 강씨는 태조와 21년의 나이 차이가 있지만 여걸로서 지략도 뛰어나 조선개국 전 이성계의 정치적 동반자이기도 하였다.


광통교는 교통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원래의 자리에서 약 155m 아래로 이동하여 조성이 되었다. 원형으로 복원하기 위해 덕숭궁 및 탑골 공원에 흩어져 있던 석재들을 모아 조선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차라리 옮기지 않고 그자리에 복원 하였더라면 역사적인 가치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 본다.


                      면석에도 구름 문양과 신장을 새겨 놓았으며 세월의 흐름 탓인지 마모된 그림도 보인다.


다리 아래 석조물을 보니 견고하였다. 과거나 현재도 정치는 한쪽이 흔들리면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할 수 없다. 왕, 왕후는 누가 만들었는가? 백성들이 만들어준 자리다. 백성이 없으면 왕이나 왕후도 없고 권력도 없다. 서로 조금만 양보의 미덕을 가지고 내려 놓을 줄 아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죽어서도 파묘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옛 말에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권력을 잡으면 10년도 못 간다', 광통교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시사하는바가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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