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번째 날 : 산후안 데 오르테가에서 부르고스까지
[산티아고 순례길(Camino De Santiago)]
산후안 데 오르테가(San Juan de Ortega)에서 부르고스(Burgos)까지 23km
이른 새벽, 사람들이 만드는 조용한 소음에 잠을 일찍 깼다. 역시 이래서 출입문 근처에서 자면 번잡스러워 좋지 못하다. 이왕 일어난 김에 그냥 출동준비를 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부르고스(Burgos).
대도시인 이곳은 까미노 길의 3분의 1이 끝나는 지점이라 할 수 있겠다.
많은 스페인 사람들은 카미노 길 전체를 완주하기보다는 구간구간 끊어서 걷기도 한다. 한 번의 완주보다는 걷는 것에 의의를 두기도 하고, 시간이 되는 데로 걸을 수 있는 지리적 근접성이 좋은 이유도 있겠다.
그래서 수년 동안 휴가 기간에만 부분 부분을 걸어 카미노를 완주한 사람들도 많다.
이런저런 이유로 생장, 론세스바이에스 혹은 팜플로나에서 시작한 스페인 순례자들 중에 오늘 목적지인 부르고스에서 일단락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때문에 이른 아침부터 그들과 이별 인사를 하였다.
발렌시아에서 온 쥬디스를 화장실에서 만났는데, 그녀도 부르고스에 도착하면 떠난다며 새벽부터 나와 수많은 포옹과 키스를 했었다. 헤어짐이 아쉬워 새벽 6시부터 서로 사직을 찍어댔는데, 둘 다 볼썽사나워 사진은 둘이만 간직하기로 했다.
오늘 이별하는 사람들 중에 다른 두 커플이 있는데, 82세 되신 할아버지 할머니 부부와 60대로 보이는 부부로써 늘 자상하게 나를 대해주셔서 참 좋아했더랬다.
60대 부부는 나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많이 해주시고, 각 지역에 대한 부연 설명과 스페인 음식에 대해서도 많이 이야기해주셨는데, 짧디 짧은 나의 스페인어 실력으론 ㅠㅠ
벌써 수십 년째, 매해마다 걸으신다는 80대 두 고령 부부는 두 분 다 아주 작고 깡마르셨는데, 그 여린 몸집으로도 젊은이들보다 더 잘 걸으셨다. 두 커플 모두 다, 부부끼리 늘 다음 행선지와 거리를 의논하고 작전을 구상하는 모습이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었다.
부부라는 게 삶의 한 방향을 위해 같이 걸어가는 여정의 동반자이겠지만, 이렇게 카미노에서처럼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한 공간을 향해 같은 목적을 두고, 같이 걸어가는 행위를 함께 해보는 것도 부부생활에 있어 정말 의미 있는 일 일 것이다.
새벽 공기를 머금고, 걸어온 탓에 다음 마을인 아헤스에 8시가 되기도 전에 도착했고, 덕분에 아헤스에서 출발하기 시작한 몇몇 사람들과 재회할 수 있었다.
그중에 독일 맥스도 있었는데, 숙소에서 나온 그는 나에게 아침인사만 건네고는 그가 먼저 치고 나가기 시작했다. 군인 출신에다가 이제 겨우 20대 초반의 혈기 왕성한 이 청년이 성큼성큼 걷는 통에 나의 짧은 보폭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다. 게다 로그로뇨에서는 클럽에 가서 밤새 춤추고 놀고 새벽 5시에 들어와 다시 8시에 걷기 시작한 무서운 녀석이다.
그런 그가 얼마 가지 않아 걸음을 멈추고는 나를 기다린다. 뭔 일인가 하고 다가가니 자기 사진을 찍어달라는 것이다.
달과 함께....
에라 이 자식아...
사진을 찍어주고는 자기도 뭔가 뻘쭘한지 나에게 계속 말을 거는데, 다리 보폭은 여전히 길고 걸음은 빨랐으며, 대답을 해주는 나는 짧은 다리로 그의 속도에 맞추느라 잰걸음을 하고 있었다.
내가 빨리 걷기 시작했더니, 그도 웃으면 속도를 내기 시작하는데, 나중엔 둘이서 경주하듯 달리기 시작했다.
그. 러. 나..
나의 똥자루가 얼마나 무겁던지 얼마 가지도 못해 엿가락처럼 속도가 쭈욱 쳐졌다. 아침부터 괜히 객기 부려 쓸데없는 에너지만 낭비했다.
하얗게 불태운 나의 아침....
한참을 걷다 보니 저 멀리 수레를 뒤로 끌고 가는 할아버지가 보인다. 어제도 봤는데, 수레를 뒤에 끌고 걸어가시는 속도가 아주 일정하다.
그분이 마침 쉬시길래, 나도 옆자리에 동석을 했다.
네덜란드 북부인 그의 고향에서부터 걸어오셨다는 그분은 이번 산티아고까지의 일정이 거의 4 달이며 벌써 3달을 걸으셨다고 하신다. 산티아고에 가면 어찌하시냐고 물었더니, 아내분이 차를 가지고 와서 같이 유럽여행을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매 5킬로 지점마다 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신다고 하셨고, 나에게도 차를 대접해주셨다.
나는 답례로 초콜릿 과자를 드리고는 그렇게 헤어졌다.
시계처럼 정확한 보폭과, 자신의 능력치에 맞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그 연세에 그 긴 거리를 걸으시는 그 힘의 원천을 알 것 같다.
중간에 환이를 다시 만나 같이 걸었다. 부르고스 도시에 도달했지만, 도시가 어찌나 큰지 목적지까지의 여정은 끝이 없다. 환이와 나는 강줄기를 따라 난 공원길로 왔는데, 지루하고 긴 걸음에 둘 다 발바닥이 타들어가는 듯했다. 목적지가 거의 다 왔다가는 생각에 무리하더라도 다 가서 쉴까 했는데, 앞으로도 3킬로를 더 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결국 둘 다 중간에 퍼지고 말았고, 약간의 휴식을 취하고 나서야 목적지인 부르고스의 알베르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찻길 쪽도 너무 지루하고 힘들었고 게 중 시내버스로 이동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고지가 보일 때는 조급해하거나 무리하지 말고 항상 휴식을 취한 뒤 길을 다시 나서라'라는 말을 알면서도 마음의 조바심 때문에 실천하기는 어렵다.
대도시의 자본이 넘쳐나는 동네에 오니 그것도 나름 좋다. 멋지게 차려입은 도시의 깔쌈하고 스타일리시한 사람들 앞에 무릎 나온 운동복에 슬리퍼가 은근 기가 죽지만, 내가 듣기론 스페인 사람들 모두는 순례자들에게 존경을 표한다고 했으니, 의상 따위엔 졸지 말자.
매일 밤마다 저녁을 먹고 순례자들과 함께하는 밤이지만 어쩌다 보니 부르고스의 밤은 한국 청년들과 함께 하게 되었다. 나를 포함한 8명이 숙소의 식탁에서 와인과 하몬을 꺼내놓고는 서로의 까미노에 대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들이 나의 순례길의 큰 의미가 될 줄 몰랐다.
사람들이 이야기하길, 카미노 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고 한다. 생장에서부터 부르고스, 부르고스에서부터 레온, 레온에서부터 산티아고. 이렇게 대표적인 큰 도시로 나눌 수도 있지만, 그 구간에 따라, 체력, 정신(metal/mind), 영혼(soul)으로 나눠진다고 한다. 들었을 때, 그냥 그랬는데, 걷다 보니 이제야 그 의미를 알겠다. 초반은 정말로 체력전이다. 특히 첫 일주일은 평소 해보지 않던 장기간의 걸음을 한다고 체력이 너덜너덜해졌다. 그러나 부르고스에 도착하고 보니, 난 체력이 많이 붙어있었고, 장시간 걷는데 점차 익숙해져 있었다.
물론 아직 왼발은 너덜너덜하지만, 이젠 그 고통에 연습이 되고 친근해진 느낌이다.
과연, 다음 2라운드는 어찌 될지는 두고 볼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