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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한 녀석 성휘 Apr 05. 2020

#14. 혼자와도 혼자가 아닌 길

열세 번째 날:  부르고스에서 온타나스까지 32km

[산티아고 순례길(Camino de Santiago)]     

부르고스(Burgos)에서 온타나스(Hontanas)까지 32km    

                                              

                                                                                                                                                                             

그런 날이 있다. 고해성사를 하듯 그냥 자신에 대해서 떠들고 깊은 날. 

이날이 그런 날이었나 보다.


부르고스 알베르게 숙소에서 느리게 출동 준비를 하고 7시가 넘어서야 길을 나섰다. 이곳은 아침 7시부터 퇴실이 가능하다 해서 설렁설렁 준비하고 나온 것인데, 알고 보니 그보다 더 일찍 나간 사람들도 많았다.

 다들 개인적으로 왔지만 알베르게의 습성상 단체생활과 다름없기에 너무 일찍 혹은 너무 늦게 움직여서 타인에게 민폐를 주는 것을 방지하고자 입퇴실에 대한 시간 제약이 있다. 알베르게는 순례자를 위한 편의시설이지 관광객을 위한 서비스 시설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제약과 규율을 따르는 것에는 불만이 없다. 



  출동 준비를 마치고 나와보니 오늘은 귀염둥이 삼인방과 같이 길을 나서게 되었다. 이제 스물 초반의 사랑스러운 이 녀석들은 팜플로나에서부터 알게 되었다. 한 번도 일정을 함께하자고 세팅한 적은 없어도 까미노의 많은 부분을 이들과 같이 다녔고, 원래 서로 아는 사이들이고 나만 이방인인데도 만나면 항상 나를 끼워 같이 다녀주었다. 다들 성격이 순둥순둥 하고 모나지 않은 성격이라 오히려 내가 배울게 많은 친구들이다. 


부르고스를 같이 떠나면서 주절주절 수다를 떤 사람은 주로 나였다.
 스페인어를 한두 마디 아는 난 간판을 읽어주며 무슨 가게인지를 설명해주었다. 빈수레가 요란하다고 몇 개 조금 더 안다고 잘난척하는 나를 그들은 경청해주었다.
그리고서는 도시를 벗어나면서부터는 온통 나 혼자 떠들기 시작하였다. 
 여태껏 순례길에서 남의 이야기를 듣기 바빴는데, 이제야 입이 터졌는지 갑자기 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사람을 좋아하지만 사람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내가 겁내고 싫어하는 사람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하나는 '집착하고 집요하게 상대를 구속하는 사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쓸데도 없는데 습관처럼 거짓말하는 사람'이다. 
이 유형을 지닌 두 사람에게서 난 내 일생의 아주 큰 상처를 받았다.

   또래보다 일찍 독립하면서 한때 난 동성 친구와 동거를 한 적이 있었다. 처음 독립을 하는 것이라 집에서도 걱정이었고 경제적으로 무리였는데, 둘이 같이 사니 걱정도 경제문제도 반으로 줄어들게 된 것이다. 
  처음엔 마냥 좋았다. 젊은 혈기로 밤새 술을 마시고 지내도 잔소리로부터 자유로웠고, 마냥 노는 게 신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차츰 지나면서 룸메이트의 행동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밖에서 놀고 있으면 5분마다 전화를 해서 나의 행방을 물었다. 그녀는 늘 나와 얼굴을 마주 보고 행동하기를 원했는데, 상태가 점점 심각해져 나중에 거의 병적으로 나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체크했고, 심지여 나의 직장동료의 모임에도 끼기 시작했다.
특히나, 그녀는 내가 남자 사람 친구들과 만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남사 친구들과 만나 때에는 히스테리까지 부려서 날 미치게 만들었다. 결국 남자 친구들을 만날 때에는 그녀도 같이 갔었는데, 이상하게도 이번엔 남자 친구들이 그녀를 싫어했다. 겉으로는 그녀한테 잘해줬지만, 나에겐 그녀를 가급적이면 데리고 나오지 말라고 하였다. 그래서 난 나의 정신건강을 위해 남자 친구들과의 만남의 횟수를 가급적이면 줄이게 되었다.
내 딴에는 룸메이트를 위한 배려였고 희생이었는데 그녀는 아니었나 보다. 그녀는 더더욱 나에게 집착했으며 마치 애인에게나 하는 행동을 나에게 해대니, 이해가 되지 않는 그녀의 행동에 난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은 나의 생일이라 집에서 조촐한 생일 파티를 하고 나서 조용히 놀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성질을 부리면서 화를 내기 시작했는데, 이유는 단지 내가 그녀랑 마주 보고 놀아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평소의 나라면 그녀를 다독거리고 이해시키려고 했을 텐데, 그때는 나도 정말 참을 수가 없고 견딜 수가 없어서 화를 냈다. 막판이라는 심정으로 화를 냈는데, 평소 나 같지 않고 화를 내는 나의 모습에 그녀도 적잖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그럼 우리 갈라서'라는 말에 난 긍정으로 대답하고 그렇게 그녀와 헤어졌다. 그녀와 갈라서서 헤어졌지만 그녀 때문에 생긴 스트레스 때문에 나의 마음과 정신은 이미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있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에 안 사실인데, 그녀가 동성인 나에게 왜 그리 집착을 보였는지 알게 된 이유로 모든 게 납득이 되었다.
그녀는 레즈비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본인조차 그런 사실을 몰랐던 것이고..
납득 혹은 이해라는 단어와 용서는 별개의 것이다.
난 그 사실을 알고 그녀를 납득하고 이해는 했지만 그 상황은 용서하지 못하겠다. 수년간 나를 핍박한 그녀는 내 인생에서 많이 원망스러운 존재이다.

또 다른 한 명은.... 이것을 설명해서 쓰자면 너무 길기에 간단하게 결론부터 이야기하겠다.
나를, 내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던 한 후배에 관한 이야기다. 그녀가 나한테 잠시 의지한 기간이 있었는데 그때 난 여러 가지로 그녀에게 극진하게 잘 대해줬다. 문제는 믿고 잘해줬는데, 그녀는 늘 내게 거짓말을 했고 나와 경쟁을 하려는지 늘 이기려는 태도를 보였다.
난 인생을 살아가는데 약간의 거짓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거짓말에 대해서는 관대한 편이다. 그런데 그녀의 거짓말은 도가 지나쳤다. 게다 나를 미치게 하는 부분은 그 거짓말이 하나도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란 것이다. 그녀의 거짓말 때문에 내 인생의 중요한 시기의 한 부분이 엉망진창이 되었기에 내 정신과 마음은 또 한 번 피폐해졌다. 그러다 이번에는 정신과 상담을 받아봤다.
답답한 심정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점집'이나 '타로 집'을 갈까 했었는데 그럴 돈이면 차라리 과학적인 추론을 해주는 곳이 나을 것 같아서 가 본 발걸음이었다.
상담 결과는 아주 맘에 들었다.
초진이라 이만 원 정도 지불했고 한 시간 정도 면담을 했었다.
정신과 의사의 진단은 다음과 같았다.
'정말 면담은 받아야 될 사람은 내가 아니고 그녀라는 것'. 
'내가 다른 사람들의 평균치보다 인내심과 참을성이 많아서 너무 참은 거라는 것. 화를 내지 못한 것은 아마도 착한 아이 콤플렉스일 것 같다는 것'
'그녀의 정신 수준은 4세 정도 아이라 그냥 생각 없이 마구 던지는 거짓말에 내가 놀아난 것'
사실은 대충 그런 것 같다고 알고 있었지만 전문의의 진단이 그렇게 내려지니 확실히 내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여하튼 그런 트라우마 때문이지, 조금이라도 나에게 그녀들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슬쩍 자리를 피하게 된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러니깐 타인에게 내 트라우마를 고백하면서 나의 상처도 조금씩 무뎌지는 느낌이다.
그래서인가, 까미노 길에서 만난 많은 이들이 자신의 상처를 이야기한다. 너무나 개인적인 이야기라 그리고 그들이 나를 믿고 털어놓은 거란 걸을  알기에 차마 블로그에 쓰지는 못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상처를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새살이 돋는다는 것을 알았다. 나도 그랬으니깐...
또한 내가 말한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은 남의 이야기도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다는 이야기도 될 것이다.
때론 남의 상처를 들어주므로 해서 나의 고민도 잊히는 것 같다. 

아이가 다치거나 넘어져 상처가 생겼을 때,  부모는 아이의 상처에 '호오'하고 입김을 넣어준다. 물리적으로 아무런 조치를 한 것 아니지만 '호오'라는 행위만으로도  아이는 마음의 안정 취한다.
까미 노위에서의 서로의 고백은 아마 그런 행위와 다름없는 것 같다. 길에서 서로 이야기를 하고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치유를 얻으니깐...






점심쯤 돼서 도착한 마을에 식사가 나오기도 전에 샹그리아부터 마셔댔다. 정오가 되면 시작하는 술이지만 동행자가 있어 더 신이 난다.


도미니까 공화국에서 온 가족들이 운영하는  한 바에서 무사 완주를 기원하면서 건네받은 펜던트.



 온타나스까지 가는 길은 오픈된 들판을 지나기에 지루했고, 뜨거운 햇살에 뜨거웠다.
그 지루한 길을 혼자 갔더라면 어찌 되었을지 생각하기도 싫다.
혼자 생각하려 떠난 길이지만, 30일  800킬로미터를 내내 혼자 걸었다면 그것도 나름 매력 있었겠지만, 같이 해서 더 즐거운 길이 많았기에 힘들어도 잘 이겨낸 것 같다.

 탁 트인 들판을 걷는 내내 보이지 않는 온타나스 마을을 향해 걸으면서 마음이 지쳐 갈 무렵, 발 아래쪽에서 숨겨진 보물처럼 마을이 나타났다.
저지대에 숨겨진 듯 마을이 위치해서 길을 걷는 내내 보이지 않아 의아했는데, 이렇게 확 나타나니 반갑고 신기해서 소름이 다 올라왔다. 




 오늘의 거처인 온타나스 마을.  앞에 먼저 도착해서 쉬고 있는 다른 순례자들의 추천을 받아 사설 알베르게에 숙박을 했지만, 식사는 공립 알베르게에 준비되어있는 순례자 식사를 했다.
먼저 도착한 하비와 안드레가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초대해줬고, 하비가 와인도 쐈다.  지난밤 부르고스에서도 저녁을 같이 먹자고 초대했는데 거절한 탓에 이번에는 같이 하긴 했는데......
이렇게 형편없는 순례자 식사는 처음이다. 샐러드라고 나온 것은 달랑 양상추뿐, 게다 그 양상추 물기도 빼지 않았다. 첫 번째 요리로 나온 것은 스파게티... 소스가 없다. 소스가 있긴 하나 양이 너무 작아서 그냥 면뿐이다. (난  면이 너무 건조해서 와인을 말아먹었다) 
너무나 맛이 없는 와중에도 저쪽 테이블의 '타이'라는 친구가 한 그릇을 더 주문했다.
나중에 왜 그 맛없는 것을 또 먹었냐고 물었더니 
타이 왈 
"첫 번째 음식이 그 지경이고 보니, 두 번째 음식은 뭐가 더 심한 음식이 나올지 몰라서... 너무 배고팠으니, 뭐라도 배를 채워야 되었거든"
그녀의 예상대로 두 번째 음식은 더 심각했다. 그냥 잘라주기만 한 햄이었다. 적어도 구워라도 줬다면 상황이 좀 나아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사이드 음식으로는 '모르시오'라는 스페인 전통순대가 나왔는데, 처음 받아본 몇몇 서양 친구들에게는  낯설고도 시커만 음식이라 입에도 대지 않았다. 다행히도 나는 모르시요를 좋아해서 그들의 몫은 전부 다 내가 해치웠다. 여태껏 먹어본 모르시오 중에 제일 맛이 없었지만, 이 순례자 음식 중에 제일 괜찮은 상태였다. 

사상 최악의 음식으로 인해 다들 멘붕상태이다. 그리고 이 날 먹은 저녁 메뉴에 대해서는 우리끼리 두고두고 회자가 되었다. 




 하비와 안드레 그리고 나 셋이서 바에서 맥주 한 잔을 마시고는 두 아재들은 자러 들어갔다. 

난 바에서 제이미와 헤랄도와 한잔 더 마시고, 숙소로 자러 들어가기 전 다시 안드리아 외 다른 일당들과 또 한 잔을  마시며 수다를 떨다가 잠이 들었다.
하루 저녁에 3차를 뛰어다니는 게 웬 말이란 말인가!!
다들 내가 혼자 외롭게 다닌다고 생각했는지 자꾸 자기들 그룹에 끼어줬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니 혼자 다닌 내가 제일 많은 친구들과 어울렸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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