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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한 녀석 성휘 Apr 15. 2020

#15. 걷는 게 일상이 된 시간

열네 번째 날: 온타나스에서 보아디야 델 까미노까지 30km

[산티아고 순례길(Camino de Santiago)]   

온타나스에서(Hontanas)에서 보아디야 델 까미노(Boadilla del Camino)까지 30Km





이른 아침부터 알람도 없이 자동으로 깨어나서 출동 준비를 했다.  

지난밤, 20명 남짓이 한방에서 지냈는데, 어쩜 모두 다 코 고는 이 하나 없이 조용히 잠을 자던지, 아주 오래간만에 숙면을 취했다.

 평소 취침 시에는 소음에 그다지 민감한 편이 아니다.  아무 곳이나 머리만 대면 숙면을 취하는 타입이고, 장기간의 여행으로 도미토리의 불편함에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타입인데 이번 까미노에서는 이상하게도 잠을 푹 자기가 힘들었다.

 육체적 피곤함에 숙면을 취할 법도 한데, 그러지 못한 것은 꼭 주변의 소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뭔가 일찍 일어나 걸어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었고, 무거운 공기가 주는 답답함도 있었다. 아마도 수많은 사람들이 품어대는 이산화탄소가 답답한 공기를 만들어 무겁게 짓누르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여하튼 간만의 숙면에 몸이 많이 가볍다. 사실은 이때가 한 달에 한번 여자들에게만 찾아온다는 마법의 기간이었는데, 다행히 묵직한 몸뚱이가 평소보다 피로를 덜 느끼는 탓에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문제는 땀띠... 여자들만 아는 그 불편함이 더위와 걷는 동안의 마찰력을 동반하여 민감한 부분에 땀띠가 났는데 은근 고통스럽다.   





 동이 트기 전 아직은 어두운 공기를 가르는 달빛과 함께 오늘도 출동이다. 

온타나스 (Hontanas)에서 다음 마을인  까스뜨로헤리스 (Castrojeriz)로 가는 길에는 산 안톤 수도회의 병원과 수도원 건물이 폐허로 남겨진 곳이 있다.

이른 새벽달이 걸친 그곳을 지나 나오면서 진짜로 내가 중세 시대의 어딘가를 헤매는 느낌이 잔뜩 들었다. 

 아마도 까미노를 걷는 동안 내내 중간중간 만나는 작은 마을들은 현란한 조명 없이 고즈넉하고 운치가 있어서인지, 문명세계를 벗어나 중세 시대를 여행하고 있다는 착각을 주었다.




까스뜨로헤리스(Castrojeriz) 마을에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 길에서 다시 재회한 환이와 같이 길을 걸었다. 귀염둥이 삼인방 중에 하나인 환이는 나랑 걸음 스텝이 잘 맞아 꽤 많은 시간 같이 걸었다. 같이 노래를 듣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흥 많은 나 때문에 피곤할 만도 한데, 그 녀석은 늘 배려 있게 행동하였다. 


둘이서 부르는 노래. '남행열차'노래가 생각이 안 나서 '아파트'만 30분을 불렀고, 마지막의 마지막 끝에 드디어 '비 내리는 호남선~'으로 노래를 시작할 수 있었다. 

 카미노 내내 부른 노래라고는 '남행열차', '아파트', 젝스키스의 '컴백' 그리고 멕시코 가수 루이스 미겔의 'El Dia Que Me Quieras'뿐이다. 

  이곡들은 평소에는 흥얼거리지도 않는 노래인데,  그 길에선 왜 그리 불러대었는지 모르겠다. 


한참을 걷고 있는데 저 멀리 언덕이 보인다. 그리고 그 언덕 사이로 길이 놓여있다. 보기에도 숨이 막히는 오르막길이다. 

"환아! 설마 저 길을 올라가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라고 해줘. 응? 아니라고 해줘"

설마는 늘 당연히 되는 것처럼 자비 없는 오르막길이 바로 오늘의 도전과제이다. 눈앞에 보란 듯이 언덕이 보이니 뭔가 주눅이 들었다. 게다 땡볕에 그늘 없이 걸으려니 시작도 전에 진이 빠지기 시작했다. 

막상 올라가니 별거 아니었는데, 시작하기도 전에 괜한 쫄보가 마음속에서부터 등장했나 보다.


까미노 중반에 이르니 부상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발의 물집으로 인해 슬리퍼를 신고 걷는 순례자.





다음 마을인 이떼로 데 라 베가(Itero De La Vega)에서 파스타와 맥주로 점심을 먹고는 또 길을 나섰다.

햇살이 뜨겁지만 그보다 더 발바닥이 뜨겁다.

까미노 2 주차, 이제는 걷는 것도 익숙하고, 체력도 끌어올라 왔지만, 아직도 뜨거운 발바닥은 감당이 안 된다.

물론, 왼발의 물집과 터진 상처도 아물려면 한참이다. 밤에는 아물고, 낮에는 덧나는 고통을 반복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고통에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나의 아픔에 그냥저냥 참아내는 기술이 늘어났다.

지루하고 뜨거운 길을 한참 동안 걸어가다가 누군가 담장에 놓고 간 토마토와 오이 하나를 발견했다.

주인도 없이 덩그러니 놓인 토마토와 오이를 집어 들고는 어떡할까 고민하다가 잡아먹기로 했다.

환이랑 둘이서 반쪽씩 나눠 먹는 꿀맛..


스페인을 여행하는 동안 난 스페인 사대주의에 절어있었다. 물가도 싸고, 와인도 맛있고, 치즈도 맛있고, 하몬도 맛있고..... 그  사대주의는 이제  짤뚝한 토마토와 오이로 인해 환이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누나, 스페인은 오이도 맛있고, 토마토도 맛있어요"





토마토와 오이로 인해 잠시 갈증을 돌리고 계속 걸어 도착한 마을은 오늘의 목적지 보야디야 델 까미노 (Boadilla del Camino)

마을이 너무 조용해서 이 마을에 머물지 아님 더 가야 할지 고민을 했지만 알베르게를 찾고 보니 친구들이 잔뜩 있기에 걸음을 멈추고 이곳에서 오늘의 여정을 마치기로 했다. 




널따란 정원이 있는 이곳은 여태 지내온 알베르게 중에서 제일 맘에 드는 곳이다
.시설로 따지자면 아주 심플한 곳이지만 마당에 가득 초록을 머금고 있는 잔디밭 하나로 소풍 나온 기분이 나게 만들었다.



하루 종일 걷는 까미노의 삶. 

걸을 때는 그리 힘들고 지겹더니, 이상하게도 샤워를 하고 나면 피로가 싹 풀린다. 내일을 못 걸을 것 같은 피로도 하룻밤 자고 나며 언제 그랬냐는 듯 또 박차고 나와 걸음을 재촉한다.

희한하게 그 짓을  반복해서 해내더라...

 샤워를 하고 나서도 제대로 쉬지는 못한다. 제일 재미없는 시간, 빨래를 해야 하기 때문...

가끔 세탁기를 이용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손빨래를 했다. 양말, 속옷, 티셔츠.. 양도 얼마 되지 않지만, 샤워 후 제대로 쉬고 싶은데도 어쩔 수 없이 꾸역꾸역 빨래를 해대는 것은 지겨운 일과 중의 하나이다.

살랑거리는 바람과 뜨거운 햇살에 빨래만큼은 진짜 금방 마른다. 

샤워를 마치고 빨래를 널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쉬기 시작한다. 


보통은 동네를 돌며 동네 구경을 하지만, 이번 마을은 작은 데다, 사순절 기간이라 문 연 곳이 아무것도 없어서 숙소에서 친구들과 수다로 하루를 마감하기로 했다.

근처 피자가게가 있다고는 하는데 그곳도 문이 닫혀있으므로 오늘은 숙소에서 순례자 메뉴로 해결하기로 했다. 

어제 봤지만 오늘도 보고, 내일 보지 못하더라도  다음날  또 만나게 될 것을 아는  순례자들과는 매일  이렇게  수다도 나누고 피로도 나눈다. 

다 같이 먹고, 다 같이 자고, 다 같이 걷는 까미노 길....

이 별거 없는 이 작업이 이젠 익숙할 데로 익숙해졌는지, 다람쥐 쳇바퀴 돌듯 아무 생각 없이 반복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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