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한 번째날 :폰세바돈(Foncebadón)까지27km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길]
아스토르가(Astroga)에서 폰세바돈(Foncebadón)까지 27km
오늘도 변함없는 일상이다. 눈뜨면 일어나 출동 준비를 한다. 지난밤 잠을 설치기는 했으나 컨디션은 나쁘지 않다.
내 옆 침대에 주무셨던 멕시코 아줌마는 지난밤에 자신의 캔맥주를 마음껏 먹으라고 할 만큼 성품이 넉넉하신 분이었는데, 그 넉넉한 마음만큼이나 풍채도 넉넉하셨고, 그녀의 코골이는 그보다 더 넉넉했다. 그렇다고 그녀 때문에 잠을 설친 게 아니다. 이유는 나의 윗 침대에 자던 에밀리의 몸부림 때문이다. 어찌나 뒤척이던지 그녀로 인해 흔들거림은 지진 강도 5 정도인듯했다. 그래도 그녀가 뒤척이는 이유를 아는 까닭에 밤새 묵묵히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
레온에서부터 걷기 시작한 캐나다인 에밀리는 지금 배드 버그와 사투를 벌이고 있다. 순례길의 악명 높은 베드 버그(빈대)에 물리면 드럽게 근지럽다고 하는데 그녀는 레온에서부터 물렸다고 했다. 레온에서도 나의 이층침대를 그녀와 공유했는데 나는 정말 멀쩡하다. 내피가 더러워서 그런지 아님 술을 많이 마셔서 알코올 성분이 많아서 그런지 그녀와 이웃을 해도 난 한방도 물리지 않은 것을 보니 옮겨오지는 않았나 보다.
예전에도 그랬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 있는 차이나타운 속 열악한 호스텔에서도 내 이층에 자던 친구는 베드 버그에 온몸이 뜯겼어도 이웃인 나는 멀쩡했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동이 스멀스멀 떠 오를 때 숙소를 나섰다. 도시에 새벽 햇살이 살포시 내려앉는 게 참 이쁘다. 조용한 여명의 골목 속으로 하나둘씩 순례자들이 나타나 자기 방식대로 걷고 시작한다. 순례길 초반에는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기도 했고 중반에는 세계 각국의 모든 이들과 이리 걷는다는 것이 경이롭기까지 했는데, 후반부에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다. 등하굣길 학생처럼 그냥 일상이 되어버렸다.
보폭이 다른 이들과는 잠시 대화를 위해 타인의 걸음 속도와 조율을 하다가도 이내 내 속도로 돌아오는 반복적인 일상이지만 매번 다른 풍경 속 다른 사람들이라 지루하지는 않았다.
아스트로가를 벗어나 한참을 가다가 영이씨를 만났다. 얼마 전부터 본 한국 처자였는데, 얼굴도 화사하게 이쁜 데다가 싹싹하기까지 하다. 순례길에 유난히 혼자 온 젊은 한국 처자들이 많았는데, 어쩜 하나같이 다들 싹싹하고 이쁜지 순례길의 외국인들이 한국 여자들의 매력에 홀랑 빠지기 십상이겠다.
그녀와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걷다가 귀염둥이 삼인방 '민', '환', '현'까지 합세하여 작은 카페에 들어갔다. 히피한 액세서리가 가득한 작고 이쁜 그 카페에서 간단히 간식을 사고 먹으려고 하니까 귀염둥이 삼인 방중 '민'이가 나에게 묻는다.
"누나. 와인 콜?"
"콜. 웬일이냐 너희들이, 너희들 술 잘 안 하지 않았어?"
"누나 때문이야, 누나 때문에 와인 맛 알아서 이젠 매일 일병씩 마셔.."
데자뷔다. 이 대사 어서 들어본 말인데....
그렇다 까미노 초반에 강아지 헨리랑 같이 걷던 플로리안이 나에게 한 말과 똑같다.
그는 나 때문에 몇 년간 끊었던 술을 다시 마시기 시작했다고 했다.
뻔뻔한 것들... 그냥 마시면 되는 거지 왜 나를 걸고넘어지냐!
허긴 까미노 이후 와인을 엄청 마셔대기 시작했다. 마을마다 들려 술 한잔하는 것이 나의 까미노 일상이 되어버렸고 나를 따라 이웃들이 마셔대었으니 다들 나를 탓할 수밖에. 맛있게 먹는 것도 죄냐?
그렇다고 내가 술을 엄청 많이 마시는 것은 아니었다.
마을에 들려 쉬면서 피로를 풀 겸, 더위도 식힐 겸 마시는 것이었는데 도수가 그다지 높지는 않다.
맥주와 탄산수(혹은 레몬수)를 섞은 '클라라'나 와인과 탄산수(혹은 레몬수)를 섞은 '틴토 데 베라노'가 내가 즐겨 마시는 술이다. 도수도 낮은 데다가 시원해서 갈증해소에 최고이다. 게다 가격도 저렴하다. 1유로에서 2유로 정도로 이천 원 안에서 즐길 수 있다. 대신 물은 사 먹지 않고 수돗물을 먹었다. 이전에는 물도 사 먹었는데 까미노 길에서는 그냥 수돗물을 받아 마셨다. 내 딴에는 지출의 밸런스를 유지하기 위해 선택이었는데, 스페인 수돗물은 안전하거니와 카페나 식당에서도 부탁을 하면 물통에 물을 채워주기에 물에 대해서는 한결 자유로워졌다.
"한 병에 얼마냐?"
테라스에 앉아서 카페 안에서 와인 한 병을 들고 나오는 '현'에게 물어봤다.
"언니, 이거 한 병에 1.5유로밖에 안 해"
대박! 마트도 아니고 카페에서 마시는데도 그 가격이라니...
그래서 주머니에서 잔돈을 털었다.
인원이 다섯 명이다 보니 와인 한 병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그래서 우린 앉은자리에서 세병을 마셨다.
거기에 삼인방이 자신들 먹는다며 도시락을 풀었다.
알뜰살뜰하게 여행하는 친구들이라 숙소에서 미리 밥을 지어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는데, 그 귀중한 것을 내 입에도 넣어준다.
게다 싸구려 소시지에 고추장을 발라주는데 어찌나 맛있던지. 밥과 고추장만 있어도 한식 느낌 팍팍 난다.
여유롭게 먹고 마시고는 또 길을 나섰다. 알딸딸한 기분에 성큼성큼 잘도 걸어갔다.
오늘의 임시 목표는 폰세바돈.
이라고 (Monte Irago) 이름의 산 정상 부근에 있는 마을이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그래도 약간의 오르막이 있다. 오르막을 올라가다가 전망 좋은 카페에서 또 한 잔을 했다. 클라라와 오루호 한잔 괜찮은 조합이다. 거기에 탁 트인 전망까지. 휴식시간마다 반주를 늘 했으니 순례길이 아닌 술례길인 셈이다.
귀염둥이 삼 인방은 이십 대 초반의 아주 사랑스러운 친구들이다. 팜플로나에서 그들을 처음 만났을 때는 별로 인상이 좋지 않았다. 인사를 해도 심드렁하게 받아 주었는데, 알고 보니 그때는 그들은 힘들고 정신이 없어서 영혼이 나간 상태였다고 한다. 막상 친해지고 알고 나니 더할 나위 없이 괜찮은 친구들이다.
성격도 순둥순둥 한 데다가 예의 있고 반듯하고 게다 아무리 힘들어도 불평불만 한마디 없었다. 구시렁거리기 일수인 내가 배워야 할 부분이다.
그들과도 한 번도 계획하고 다닌 적이 없었지만 늘 자주 부딪혔다. 하비와 안드레 다음으로 까미노 길에서 가장 나와 많이 시간을 나눈 친구들이기도 하다.
마음 안 붙이고 그룹 만들어 다니지 않기로 한 까미노지만 한 겹 한 겹 시간이 주는 인연으로 인해 두 아재들과 함께 귀염둥이 삼 인방은 카미노가 나에게 준 선물이 되었다.
놀멍 쉬멍 하며 오는 탓에 폰세바돈에 도착하고 나니 거의 5시가 되었다. 일단 민생고부터 해결해야 될 것 같아서 근처 알베르게의 식당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하면서 작전을 짜기로 했다. 더 갈지 여기서 머물지 갈등이 넘나들었다.
이곳에서 지내는 것이 나쁠 것은 없으나 문제는 위치.
텐트에서 생활하는 삼인방에게 이곳은 좀 힘들어 보인다. 산비탈 쪽에 있어서 바람이 거침없이 몰아치는데 새벽에는 너무 추울 것 같다. 때문에 산을 하나 넘는 것도 나을 것 같다.
여러 고민을 하며 마을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안드레를 만났다.
하비를 중간에 잃어버린 그가 나를 보자 어린애처럼 기뻐한다. 그러면서 그가 말하길 그는 기부금을 내고 지내는 도미토리에서 지내고 있다고 한다. 자리가 남았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했다. 적은 예산으로 다니는 삼 인방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뉴스다. 다행히 딱 4자리가 남아 우리는 그곳에서 지내기로 했다. 차가운 산 공기를 품고 밤을 지새울 그들이 걱정이 되었는데, 이로써 한시름 걷어냈다.
기부금을 내고 지내는 알베르게 정원인 20명도 안되는데 다들 눈치게임을 하는지 그 늦은 시간에도 자리가 있었던 것을 보면 우린 정말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 게다 저녁까지 준다고 하니 이거야말로 금상첨화이다.
좁은 알베르게에서 자원봉사자들이 만들어준 저녁식사를 순례자들과 같이 했다. 간단한 음식이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함께 저녁을 나누었다. '식구'라는 단어가 같이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같이 식사를 하고 같은 공간에서 잠을 청하고 같은 길을 계속해서 같이 걸어 다니며 각자의 감정과 고민을 공유하니 이래저래 순례자들끼리 그렇게 식구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삼인방은 일찍 취침을 하고 난 안드레, 에밀리, 산드라와 함께 근처 바에 가서 또 와인을 했다.
지금 와 돌이켜 생각을 하면 그렇게 놀고 걷고 와서도 또 놀러 나가는 에너지가 넘쳐나는 것 보면 카미노 체력은 엄청난 것 같다. 평소 체력은 그리 좋지 않은데 말이다. 허긴 평소 저질체력인 내 친구는 쇼핑할 때는 체력이 넘쳐나는 것을 보면 각자의 체력이 절대치가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야말로 본인이 제일 좋아하는 일을 하면 정말 없는 체력도 만들어내는 것 같다.
산드라와 에밀리가 자러들어가고 안드레와 남아 둘이 이야기를 했다. 어제 하비와 나랑 셋이서 나누던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싶었나 보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트라우마를 지우기 위해 애쓰고 있었는데 그의 큰 마음의 추를 내가 어떻게 덜어줄 수 없으니 들어주는 수밖에... 그래도 그렇게 내가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그나저나 내일 안드레가 저녁같이 먹자고 하는데 이거 데이트 신청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