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네 번째 날: 오 세브레이로 (O Cebreiro)까지 30Km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길]
비야프란카 델 비에르소 (Villafranca Del Bierzo)에서 오 세브레이로 (O Cebreiro)까지 30Km
새벽 5시도 안되어서 잠이 깨었는데 메시지를 확인해보니 한국에서부터 날아온 일거리가 잔뜩 있었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 그만둔 직장에서 추가 작업 분을 보내주었는데, 그것 때문에 꼭두새벽부터 열이 받았다. 일 그만 둔지 몇 개월이고 지금은 휴가를 즐기는 중인데 이역만리 떨어진 곳에서 일거리를 받는다는 것이 아주 심란하다. 게다 별 중요하지도 않고 그냥 자기들이 쓱쓱 처리할 수 있는 일을 잘 놀고 있는 나한테 깨톡으로 보낸다니 이것은 분명 음모이고 배신이다. 구시렁거리며 30분 만에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반사 깨톡을 보내 결말을 내었지만 온전히 휴가를 보내는 중간에 잠깐이라도 일을 했다는 데에서 왠지 모를 스트레스를 받았다.
침낭을 덮어쓰고는 일하는 중간에 하비며 안드레며 엠마가 출동하는 것을 알았지만 계속 이불을 덮어쓴 채 인사는 하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는 나도 조용을 짐을 들고 나와 출동 준비를 하였다. 더 자고 싶지만 어차피 잠이 다 깨서 도로 잠들 수도 없었으니 할 수일이라곤 출동하는 것뿐이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떠나는 비야 프랑카 마을.. 어스름한 분위기에 따뜻해 보이는 조명으로 가뜩이나 이쁜 마을이 더 이뻐 보인다. 공복으로 슬슬 걸어서 다음 마을에서 아침을 해결했다. 베이컨이 잔뜩 올라간 샌드위치였는데 아침부터 묵직한 것을 먹고 있다고 지나가는 아는 순례자들한테 한 마디씩 거들었다. 아침식사로 삼겹살은 사랑인데, 왜 그들은 그걸 모르냐?
아침을 먹고 일어난 자리에 누군가 등산 스틱을 두고 간 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내 옆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던 순례자인 모양인데 대충 그의 인상착의를 기억하기에 그의 스틱을 들고 그를 찾아 나섰다. 다행히도 다다음 마을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그를 발견했다.
그는 독일에서 온 안드레(같이 이름이 왜 이리 많으냐)라는 아저씨인데, 마침 카페에서 다른 순례자에게 스틱을 잃어버렸다고 넋두리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바로 그 순간 내가 그의 스틱을 들고 나타났으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커피라도 사준다고 했지만 정중히 거절하고 가던 길을 계속 갔다. 크~~ 나 쫌 기특한 듯...
희한하게도 지난날부터 걸음이 빨라져서 다른 순례자들을 제치고 다녔다. 뭔 약물이라도 먹었는지 걸음이 무지하게 빨라졌는데 아무래도 체력이 많이 붙은 것 같다. 뭐 터진 생살은 여전히 아프지만 그 아픔에 익숙해졌기에 이젠 그냥 아무 생각이 없이 걷는다.
아는 얼굴인 줄리와 새미 그리고 바트랑도 중간중간 겹쳐 걷기도 하고 엇갈려 걷기도 했다.
중간에 바트와 대화를 나누며 걷기도 했지만 빨라진 내 발 때문에 그를 버리고 스피드를 내기도 했지만 또다시 겹치는 것은 이젠 까미노 길에서 흔한 일이다.
오늘의 목적지 오세브레이로'로 정했다. 오세브레이로는 산맥의 상단 부분에 위치하고 있어 경사가 꽤 가파른 구간을 올라가야 한다. 오르막으로 올라가기 직전의 마을에서 일단 요기를 하기로 했다.
그러는 중 뒤에 따라오는 하비와 안드레에게 잡혔다. 나보다 일찍 출발했는데도 불구하고 나보다 뒤에 있기에 물어보니 산길을 돌아왔다고 했다. 그리하여 우리 셋은 같이 점심을 하게 되었다.
하비가 주머니에서 알밤을 주르르 꺼낸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저리 화살표시를 만들었다.
'이런 밤 같은 열매는 산동물을 위해 남겨둬야지'라고 면박은 주었지만 아재들이 나를 챙겨주면서도 놀리는 마음이 고맙기도 재미있기도 했다.
식사를 마치고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었다. 키도 크고 다리도 긴 두 아재는 쭉쭉 치고 나갔고 짧은 보폭의 난 무거운 엉덩이를 바짝 치켜들어 올리며 힘겹게 걸어 올라갔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다 보니 마을이 보였는데 그곳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바트다. 팜플로나에서부터 알고 지내온 그와는 계속해서 부딪혀왔기에 꽤 정이 많이 들은 친구이다.
그 마을에서 오늘 밤을 지내기로 했다는 바트와 함께 바에 앉아 그가 사주는 맥주를 마셨다.
바트는 벨기에에서 온 공무원이다. 그는 주로 토지 세금에 대한 민원담당을 맡고 있는데 그가 제일 잘하는 것은 서류에 형광펜으로 밑줄을 치는 일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서류의 내용 등을 잘 읽어보지도 않고는 그냥 면담하러 와. 서류에 다 기재되어있는데 무작정 잘못 세금이 나왔다고 따지고 드는 거지. 그래서 난 서류를 펴서 해당 조건이 있는 구절에 형광펜으로 밑줄을 치지. '시간 내서 발걸음 주신 것 감사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한참을 그와 노닥거리고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길을 나서야 될 것 같아서 가방을 둘러매었다.
"잘 갈 수 있겠어?"라는 바트의 물음에
"뭐 다음 마을까지만 가면 되는데 뭐, 2~3킬로만 더 가면 되는데 뭐"라고 응수하니 바트가 충격적인 소식을 알려준다.
"오늘 네가 가려는 마을은 다음다음 마을이야, 5~6km는 더 올라가야 해"
"뭐?" 충격이다.
"아까 네가 오세브레이로 바로 전 마을인 라구나 데 까스띠야 Laguana De Castilla에서 묶는다고 하지 않았어?"
"응 그랬는데, 여기 괜찮은 알베르게를 발견해서 여기서 쉬려고. 내가 말한 라구나 마을은 그다음 마을이야"
"뭐?!"
오세브레이로 바로 전 마을에서 쉬겠다는 바트를 보고는 '이제 목적지까지 쪼금만 더 가면 되는구나'하고 여유 있게 생각했었는데 더 가야 한다니 낭패이다.
여하튼 가기로 했으니 출동을 해야겠다.
바트와 식당에서 헤어지자마자 코너를 돌아 나오니 그가 지낸다는 알베르게가 보였다. 히피한 분위기에 채식요리를 판다는 그곳에 엠마도 앉아있었다.
"너도 여기서 지내는 거야?"라고 내가 물었을 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음식이 다 채식이라고 하니 여기서 쉬면서 식사를 하려고, 네 친구도 여기서 지내더라"
바트도 같은 순례자인데, 그녀는 '네 친구', '내 친구'로 딱 금을 그어두는 말투이다.
생각해보면 그녀는 하비, 곤드레, 조던 이외에는 그 누구도 어울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이 챙기지 않으면 그녀는 늘 혼자 있었다.
식중독인지 단순 급체였는지 이틀 전부터 속이 안 좋았던 그녀가 참으로 걱정스러웠다. 원래 음식도 많이 안 먹는 친구인데 속까지 안 좋으니 뭐라도 제대로 먹어야 할 텐데, 이곳이 채식 식당이라는 말에 뭔가 마음이 놓인다.
그녀에게 안부를 전하고는 계속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이번엔 진짜 오세브레이로의 전 마을인 라구나데카스티아에 도착했다. 거기에서 스페인 순례자인 산티아고와 여수를 만나 담소를 나누었다. 얼마 전부터 까미노 길을 시작했다는 그들과는 벌써 안면을 튼 상태였기에 부담 없이 담소를 즐겼다. 물론 맥주와 함께였다.
한참을 그들과 수다를 떨고 있는데 그 Bar의 여직원이 나를 부른다.
"너 아까 오세브레이로간다고 하지 않았니?"
"응"
"내 생각엔 지금이라도 빨리 가야 할 텐데, 어제도 이맘때쯤 그 알베르게가 만원이었어"
"뭐, 뭐라고?"
오늘 일진이 뭔가 사납다. 급한 마음에 알베르게에 전화를 했지만 아무도 받지를 않는다. 그리고 내 뒤로 다른 순례자들이 계속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얘들아, 안 되겠다. 나 가봐야겠다. 나중에 보자"
남은 맥주를 무섭게 입에다 털어 넣고는 여수와 산티아고에 다급하게 인사를 하고는 길을 나섰다.
분주하고 부산했던 내 모습을 보고는 그들은 내 뒤통수에 대고 낄낄대며 "행운을 빌어, 부엔 까미노"라고 말에 고맙다고 대답도 못하고 쌩하니 달렸다.
'이럴 옘병, 104등 안에 들어야 돼, '
오세브레이로의 공립 알베르게는 단 하나, 104명이 정원이 그곳에 104등 안으로 내가 들어가지 못하면 숙박을 장담 못하니 오늘 안으로 산을 하나 넘어야 한다.
소문으로는 들었다. 알베르게의 정원이 한계가 있기에 만석이 되면 어쩔 수 없이 다음 마을까지 이동해야 한다는 것을. 근데, 그게 비수기인 4월에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니 애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한 번도 숙소 선점에 대해서는 불편함 없이 다녔는데...
스트레스를 내려놓고 마음의 안정을 찾겠다고 찾아온 순례길에서 말도 안 되는 경쟁으로 스트레스를 받으며 다녀야 한다니, 뭔가 참 아이러니하다.
'내 뒤의 순례자들이 지금 나의 경쟁자들이다. 저들을 제치고 나서라도 104등 안에 들어야 해!'
조급한 발걸음으로 그 오르막길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나중에 내 뒤에 있던 브라질 커플의 이야기로는 내가 무섭게 오르막을 내달리는 것을 보고 철인인 줄 알았다고 했다.
허긴 그 오르막길을 큰 배낭을 메고 단거리 달리기 선수처럼 무섭게 내달렸으니...
차마 그들에겐 '104등 안에 들기 위해 어쩔 수 없었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참으로 아이러니다. 다들 선한 마음 여유로운 마음을 순례길을 나서는데 숙소에 있어서는만큼은 경쟁을 하며 눈치전쟁을 해야 하다니...
그렇게 치열하기 살기 싫어서 도망치듯 여행을 나왔지만 눈치게임의 세계만큼은 도망갈 곳이 없다니..
그래서 어찌 되었냐고.. 104등은 아니고, 100등 안에 충분히 들었다.
104명의 정원이 묵을 수 있는 그 알베르게는 80명이 쓰는 큰 방과 나머지 소수가 쓰는 작은방이 있는데 늦게 온 덕에 작은방에 지낼 수 있었다.
먼저 온 하비와 곤드레도 나와 같이 작은 방에 지내게 된걸 보니 그들과 나 사이에 다른 순례자들이 많이 있지는 않았나 보다.
그리고 여기서 귀염둥이 삼인방과도 재회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일 반가운 얼굴인 마리아를 다시 만났다.
헐레벌떡 올라온 그 길에 마리아는 내 이름을 부르며 두 팔 벌려 나를 맞이해줬다. 론세스바예스와 수비리 그리고 팜플로나까지 같이 걸어온 마리아. 나에게는 정말 순례길 초기 멤버이다.
내가 팜플로나에서 페르민과 산세바스티안으로 여행을 갔다 오느라 그녀와 이틀 간격이 벌어졌는데 이리 다시 만나니 들뜬기분이다.
이전 레온에서 그녀와 메시지를 주고받았기에 서로의 거리가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예상보다 빨리 그녀와 재회를 한 것이다.
그동안의 밀린 이야기를 폭풍 수다로 풀어냈다.
빨래를 하고, 샤워를 하고, 순례자들과 같이 저녁을 먹는 평소와 다름없는 시간이지만 오랜만에 재회한 마리아 때문인지 뭔가 동창회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마리아하고는 다음날 마주친 것 이후로는 순례길에서 볼 수 없었다. 내가 그 이후로 박차고 빨리 걸었기 때문인데, 대신 산티아고에서 그녀를 기다려 다시 만났다.
그리곤 한국행 비행기를 타러 영국 런던에 잠시 들렸을 때, 그녀가 살고 있는 런던에서 그녀와 재회했다. 그러니 그녀와 나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처음과 끝, 그리고 사후 첫 재회까지 같이 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