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명랑한 녀석 성휘 Mar 12. 2021

#26. 같이 걸으니 견디어 내는구나!

스물다섯 번째 날 :  사리아 (Sarria)까지 40km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길]

오세브레이라 (O Cebreira)에서 사리아 (Sarria)까지 40km




 어둠이 걷히고 동이 터오는 그 시간 주섬주섬 짐을 챙겨 홀로 길을 나섰다. 슬슬 이 짓거리가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지겨운 것은 왼쪽 새끼발가락의 터진 생살이다. 혹자는 미련하게 그런 발로 걸었냐고 하겠지만 정말 발가락 하나만 빼고는 사지가 다 멀쩡하니 안 걸을 수가 없었다. 게다 터진 살은 하루 이틀 쉰다고 아물어진다는 보장이 없기에 그냥 빨리 이 순례길을 끝내고는  푹 쉬어서 발을 치료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하루에 걷는 거리를 길게 빼기로 마음먹었다.
또한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맡겨놓은 짐을 우체국에서 찾아야 하기에 웬만하면 금요일이나 토요일 오전 중으로 산티아고 입성하고 싶었다. (우체국은 토요일 1시까지 영업하며 일요일은 휴무이다)
그래서 오늘 목표는 사리아까지 40킬로를 걷기로 정했다.
그런데 이놈의 발가락이 초장부터 말썽이다. 아침부터 욱신욱신 아프고 찌릿찌릿 전기도 왔다. 그래서 이른 아침부터 쉬었다 걸었다. 신발을 벗어다, 고쳐신었다 생쇼를 하면서 걸어갔다.



 아침 햇살이 성 야고보 동상에 내려앉은 그곳에서 난 귀염둥이 삼인방에게 따라 잡혔다.
현이, 환이, 민이. 반가운 그들과 같이 걸으니 고통이 좀 잊히는 느낌이다.
아침식사를 하러 들어간 카페에서 우린 커피와 빵으로 요기를 하고 있었는데 주변의 큰 개들이 우리 주위로 몰려왔다. 그중 개 한 마리의 눈이 짝짝이였는데 나는 그 유명한 '오드아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데 상황 판단에 늘  냉정한 현이가 "언니, 오드아이가 아니라 백내장일지도 몰라." 현이는 그 개의 눈도 쳐다보지 않고 아무렇게나 말하는 말투였다.
"뭐 백내장?" 자세히 들여다보니 맞다. 그 개는 백내장으로 인해 한쪽 눈동자가 하얗게 변한 것이었다. 개한테는 미안하지만 우린 그것 때문에 크게 웃었다.
현이 딴에는 농담조로 던진 말인데 귀신같이 들어맞은 것이다.
그밖에도 별거 아닌 농담에도 우린 까르르 웃어댔다.
이 아이들은 나에게 엔도르핀을 돌게 하는 뭔가가 있다.


"언니, 오늘 어디까지 갈 거예요?"
"일단 사리아"
"와 대박, 언니가 하루 평균 40km씩 걷는다는 게 사실이었어" 홍일점인 현이가 나에게 놀리듯이 말했는데 그녀의 말투는 냉소적이면서도 귀여워서 늘 나를 웃게 만들었다.
"그럼 우리도 오늘 사리아까지 같이 가볼까?" 민이의 말에 환이도 현이도 다 동조를 했고 그래서 우리는 오늘 하루 긴 여정을 같이 하기로 했다.







 꼬불꼬불 산길을 걸었다가 경사가 가파른 길을 굴러가듯 빠르게 내려갔다가 길바닥에 주저앉아 쉬기도 했다가 하면서 뜨리아까스텔라 Triacastela까지 힘차게 걸었다 가파른 경사로 인해 다소 힘들긴 했지만 동행자가 있었기에 힘이 났다.
 뜨리아까스텔라 마을 초입의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했는데 돼지고기 스테이크와 오징어튀김이  어찌나 맛있던지 우린 아주 오랫동안 그 음식 맛을 극찬했다. 
점심을 먹고는 난 식당 담벼락에 몸을 누이고는 길바닥에서 그렇게 낮잠을 잤다. 한 30분쯤 잔 것 같은데 나 때문에 아이들을 기다리게 한 것 같아  많이 미안하다.
 그렇게 약간의 휴식 후에 우린 길을 또 나섰다.
사리아까지는 20km를 더 가야 하는데 과연 오늘 안에 도착할지 의문이기도 하지만 오늘 안에만 도착하면 되지라는 심정으로 걸었다.


 

 개울이 보이면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고, 분수가 보이면 등목을 하고, 바가 보이면 맥주 한잔을 하며,  마치 시골 할머니네 뒷동산에 놀러 온 거처럼 여유 있게 행동하는  귀염둥이 삼인방에게서 길 그 자체를 즐기는 마음을 다시금 깨우치게 된다. 
그래서인가 난 이들이 그렇게 이쁠 수가 없었다. 요 삼인방과의 시간은 하비안드레의 시간과 함께 까미노가 준 선물이다.
'까미노 길에서 정 주지 말아야지'라는 심정으로 사람들과 오래 어울리지 않았다. 같은 일행과는 이틀 이상은 엮이지 않으려고 했고 가급적이면 많은 사람과 부딪힐 뿐 깊게 엮기 지는 않으려고 마음먹었는데 그 사이 정이 들어버린 이들 앞에선 난 무장해제가 되어버렸다.

인연이라는 것이, 정이라는 것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가 보다.



   걷는 중간 마을을 지나고 있었을 때, 난 주민 아주머니에게 마실 물이 어디쯤 있는지를 물어봤다. 아직 물통에 물은 있지만 여유 있게 준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주머니는 주변에 수돗물은 없으니 자기 집에 들어가서 떠 주겠다고 했다. 아직 남은 물이 있으니 괜찮다고 사양했는데, 옆에서 현이가 나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언니, 그냥 집에 들어가요. 집에 들어가면 저 아주머니가 파전에 막걸리 한 상 받아놨을 거예요"
걷기도 바쁜 와중에 이런 통통 튀는 발상은 어디서 튀어나오는지 모르겠다.

 까미노 순례길을 걸으면서 난 하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그건 빨리 걷기, 오래 걷기, 아주 길게 걷기, 새벽에 걷기, 야간에 걷기였다. 그중 아직까지 못 해본 것이 야간에 걷기였는데 운이 나쁘면 사리아까지 이들과 함께 야간 트레킹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왜냐면 햇살이 길게 뻗어 내린 늦은 오후가 되어서도 우린 사리아에 도달할 기미가 안 보였으니깐....


그렇게 걷다가 사리아를 한 3km 남겨두고 난 발바닥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 도저히 못 걷겠으니 난 이번 마을의 알베르게에서 지내겠다고 말은 했지만  막상 근처의 알베르게에 혼자 들어가려고 하니 도저히 이들과 떨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뜨겁게 달아오른 발을 참으며 끝끝내 사리아에 도착했다.  밤 9시쯤에나 사리아에 도착했으니 진짜 오래 걸은 셈이다.
 서머타임을 시작한 데다가 해가 늦게 지는 탓에 밤 9시가 되어서도 깜깜하진 않았으니 야간 걸음은 글러먹었지만 그래도 이리 늦게까지 걸을 수 있었던 것도 혼자가 아닌 이들과 함께 했기 때문이다.




 사리아의 마을 초입에 있던 사립 알베르게를 발견하고는 그냥 거기로 들어가 몸을 뉘었다. 현이민이는 더 싼 알베르게 혹은 텐트를 칠만한 장소를 찾아 사리아 깊숙이 들어갔고 환이와 나만 그 사립 알베르게에서 지내기로 한 것이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공립 알베르게에 갔어야 했었는데 도저히 거기까지 갈 엄두가 나지 않아서 선택한 결정이었는데 이게 신의 한수가 되었다.

 그 알베르게에는 투숙객이 아무도 없었고 오직 나와 환이만 독차지하게 된 것이다. 넓은 도미토리의 양 끝 모서리에 환이와 내가 각각 짐을 풀었다. 거실에 TV도 있어서 환이는 오랜만에 스페인 축구 중계를 본다고 열을 올렸고, 난 오랜만에 와이파이 빵빵 터지는 곳에서 신나게 인터넷 서핑을 즐겼다.

조용하고 아늑하고 청결한 곳에서 그렇게 꿀 같은 시간을 보냈다.


또 하나, 다음날 들은 소문으로는 내가 가려던 공립 알베르게는 그날 수학여행으로 순례길에 오른 고등학생들 때문에 난장판이었다고 하니 피로감이 부른 차선이 최선이 되었던 순간이었다.


그렇게 그날 밤은 고요 속에 꿀잠을 청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25. 까미노길 위의 눈치게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