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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규 Dec 23. 2018

나는 어쩌다 법을 공부하게 된 걸까? (3)

3부: 거칠게 몰아치는 물처럼

나는 어쩌다 법을 공부하게 된 걸까?

3부: 거칠게 몰아치는 물처럼


<이 글은 2부에서부터 이어지는 글입니다>


대한민국의 남성들에게 군생활의 추억이란 참 특이한 것이다. 군생활의 추억은 대개 안 좋은, 즉, 춥고 배고프고 고단했던 시절의 표상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지만, 또 군생활의 추억만큼 성인 남성들이 평생 떠들썩하게 웃으며 공유할 수 있는 주제도 없다. 애증(愛憎)인 것이다.


나는 군대에 입대하게 된 계기부터가 좀 특이했다. 만 16세가 되기 전, 대한민국의 모든 이중국적자들은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할지 말지를 결정해야 하는데, 나 역시 치즈와 맥주로 유명한 미국의 위스콘신 (Wisconsin) 주에서 태어난 이중국적자였던지라 언젠가 그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때는 2004년 봄, 그런 인생의 중대사를 결정하기엔 너무나도 한가로웠던 어느 일요일 낮이었다. 온 가족이 모여 말없이 멸치국수를 먹고 있던 중에, 아버지는 나보고 군대에 갈 생각이 있냐고 넌지시 물으셨다. 여느 또래의 혈기왕성하고 꿈 많은 남자아이라면 밥상을 엎을 기세로 반발할 수도 있었겠지만, 전 글들에서 누누이 밝혔듯이 난 별다른 계획과 미래에 대한 구상 없이 오직 '오늘만 사는' 천하태평한 아이였다. 그날도 난 군입대라는 먼 미래의 일보다는 당장 내 눈앞의 멸치국수가 불어 가고 있다는 게 더 큰 걱정이었다. 배는 고프고, 길게 생각하긴 귀찮고, 결국 "에라 모르겠다" 하며 아버지의 생각은 어떠하시냐고 물었다. 이게 내 실수였다.


아버지는 벼르고 계셨다는 듯이 갑자기 연안(延安) 땅을 본관(本貫)으로 삼았던 우리 가문의 연대기를 늘어놓기 시작하셨다. 상신 9명, 대제학 8명, 호당 10명, 청백리 7명, 그리고 문과 급제자 261명을 배출해 우리나라 명문거족의 대표 격인 연안 이 씨 가문의 장손인 내가,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고작' 독수리 여권이라는 종이 쪼가리 하나 가지고 회피한다면, 그건 후대에 웃음거리가 될 일이라고도 하셨다. 무과 급제자가 261명인 것도 아니고 문과 급제자만 261명인 우리 가문과 군(軍) 사이의 연결고리가 다소 빈약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버지의 말씀을 다 듣고 나니 얼굴도 모르는 우리 가문의 조상님들이 한꺼번에 나를 내려다보고 계시는 같은 기분이 들어, 나는 얼떨결에 그 자리에서 바로 아버지께 군대에 가겠다는 약속을 했다.


결국 철없던 시절, 그저 남은 멸치국수가 더 불어버리기 전에 먹고 싶었던 나의 소박하고도 인간적인 바람에 꼬리 문 이 약속 하나가, 몇 년 뒤 나를 군대로 보낸 것이다. 그리고 형태 없고 유연한 물이 되라는 왕 교수님의 가르침을 뒤로한 채, 대학 졸업 후 바로 들어간 이 군대란 곳은 유연함은 개뿔, 빳빳하게 세운 '각'만이 전부인 세상이었다.




나는 자대 배치 첫 주부터 내 맞선임이었던 동갑내기 최일병에게 시도 때도 없이 줘 터지기 일쑤였다. 가수 지망생이었던 최일병은 노래실력은 잘 모르겠지만 특유의 그 쨍쨍한 목소리로 사람들을 갈굴 때만큼은 정말 '득음'의 경지에 다다른 '명창'이라 칭할만했다.


"야, 넌 나이를 그렇게 처먹고도 삽질 하나 제대로 못하냐."


"야, 너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은 쓰레기라는 말도 아깝다."


"야, 난 아직도 미국인인 네가 우리나라 군대에 온 게 이해가 안 돼. 너 스파이지."


나를 더욱 힘 빠지게 했던 건 그의 태도였다. 갈굴 때 최소한 아이컨택이라도 해줬다면 갈굼 당하는 내 입장에서도 경청할 마음이 조금이라도 생겼을 텐데, 최일병은 날 갈굴 때마다 늘 심드렁한 표정으로 습관적으로 코를 후벼댔다. 입으로는 쉴 새 없이 내가 얼마나 조그마한 인간인지 떠들어대면서, 또 손가락으로는 쉴 새 없이 조그마한 코딱지를 돌돌 말아댔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내가 코딱지인지, 아님 저 코딱지가 나인지 분간이 안될 정도로 내 멘탈 역시 돌돌 말려지는 기분이었다.


야, 빨래 제대로 안 해?


야, 밥 더 빨리 안 먹어?


야, 허리 더 꼿꼿이 안 세워?


야, 누가 가만히 앉아있으래!


원래 사소한 욕은 잔잔한 연못의 수면 위에 던져진 조그만 자갈처럼 작은 파장밖에 일으키지 못한다. 하지만 그 조그만 자갈들도 수천 개 이상 수면 아래로 던져지게 되면, 연못의 물도 결국 범람하기 마련이다. 내 마음이 딱 그럴 지경이었다. 정말 시시때때로 이렇게 혼나다 보니, 왕 교수님의 말씀을 따라 형태 없는 물처럼 살아보기도 전에, 형태 없는 영혼이 되어 이 지구의 성층권 밖으로 날아가버릴 것만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건 결국 '탈출'밖에 없었다.




MBC의 『진짜 사나이』 중


물론 진짜 탈영을 계획한 건 아니었다. 최일병을 한대 갈기고 영창을 가기도 싫었다. 대신 나는 책 읽기에서 탈출구를 찾았다. 평생 책과는 담을 쌓고 살아온 나였지만, 군대에서는 독서가 잠시나마 내 서글픈 현실을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자유시간이나 연등시간에 책 읽는 걸 걸렸다간 또 최일병에게 헌책 위에 쌓인 먼지 털리듯이 혼날게 뻔했기에, 나는 주로 모두가 잠든 주말 오침 시간이나, 불침번 교대 전 후에 생기는 자투리 시간을 활용했다.


내가 군대에서 처음 접한 책은, 음산했던 그 당시 나의 심정을 너무나도 잘 대변해주었던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었다. 『죄와 벌』에서 느꼈던 그 투철한 심리분석과 극적인 전개에 매료되어, 난 그 후로도 틈틈이 병영도서관에 들어가 끌리는 제목이 있으면 뽑아 뒤적이곤 했다. 워낙 책에 대해 아는 게 없다 보니, 누구나 한두 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제목들만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해서 접하게 된 책들이 『돈키호테』,『이방인』,『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파우스트』, 『신곡』과 같은 불후의 고전들이었다.


이렇듯 고전 독서를 통해 나의 지적 호기심이 한창 에 달해 있을 때, 내 맞후임인 김일병의 관물대에 꽂힌 두꺼운 영문 책이 눈에 들어왔다. 김일병은 내 맞후임이었지만, 82년생으로 나보다 무려 7살이나 많은 큰 형님 뻘이기도 했다. 그 역시 나와 같은 이중국적자였는데, 미국 로스쿨에서 법학박사 학위 (Juris Doctor)를 따고, 변호사 자격증까지 취득하느라 입대 시기가 많이 늦어져 한참 어린 나 같은 동생들과 군생활을 같이 하게 된 것이었다.


그의 관물대에 있었던 책은 블랙 법률 사전 (Black's Law Dictionary)으로 1891년 헨리 캠벨 블랙에 의해 처음 출판되어, 수많은 대법원 판례에 인용될 만큼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미국의 유명한 법률전문사전이었다. 내가 그 책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자, 김일병은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이일병 님은 항상 책을 끼고 사시는 게, 로스쿨에 가셔서도 잘 해내실 거 같습니다. 혹시 법 공부해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난 단 한 번도 '법'이라는 단어와 나를 깊게 연관 지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당연했다. 내가 막연하게나마 그려왔던 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이미지는, 투철한 사명감과 진득한 성실함으로 무장한 사람들이었다. 아시다시피 나는 그 둘 다 없었다. 그리고 당시 최일병의 코딱지보다도 못한 삶을 살고 있던 나였기에, 법이란 단어는 더더욱 크고, 무겁고, 거창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팔랑귀'여서 그런지, 아니면 고전들을 읽으면서 어울리지도 않는 지적 허영심을 갖게 되어서인지는 몰라도, 법 공부가 나와 어울릴 거 같다는 김일병의 말은 벌써부터 내 마음을 심히 요동치게 하고 있었다. 심지어 내 안 깊숙한 곳에서부터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마음의 소리가 아니라 최일병이었다.




짬도 별로 안찬 일병들끼리 한가로이 노닥거리니까 좋냐는 최일병의 비아냥에도, 아까부터 내 머릿속에서 맴돌던 이 법이라는 단어는 쉬이 떨쳐 내지지 않았다. 김일병은 별생각 없이 무심코 던진 말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의 말은 어느새 뜨겁게 달구어진 인두가 되어 내 가슴을 지짐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좀 더 과장을 보태자면, 그의 말은 늘 방향 없이 표류하기만 했던 내 인생에 마치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는 것만 같았다. 며칠 뒤, 이러한 흥분이 가시기는커녕, 오히려 열병 같이 더 주기적으로 찾아오자, 나는 결국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어 미국 로스쿨 입학시험 (LSAT) 기출문제를 구입해 소포로 부쳐달라고 부탁드렸다.


며칠 동안, 나는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애타게 LSAT 문제집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문제집이 도착하자, 난 단숨에 포장지를 뜯어, 한쪽 다리가 심하게 삐그덕거려 늘 왼쪽으로 5도 정도 기울던 군용 책상을 꺼내 펴고, 그 위에서 문제들을 하나하나 풀어보기 시작했다.


LSAT 공부는 생각보다 재밌는 것이었다. 일단 내가 어릴 적부터 극도로 싫어하던 암기과목이 없었다. 모든 문제는 IQ 테스트와 같이 논리력을 시험하는 퍼즐 형식이었고, 문제를 깊이 파면 팔수록 전에는 보이지 않던 지름길들이 새롭게 보이기도 했다. LSAT 문제가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을 보니, 그저 딱딱한 단어들의 고리타분한 나열이라고만 생각했던 법이라는 학문도 실상은 재밌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마저 들었다.


그 후, 나는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LSAT 공부에 매진했다. 물론 군대 내에서의 자유시간이라는 게 아무리 많아봤자 하루에 1-2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내가 분대장이 된 후 최일병, 아니 이제는 최병장이 된 이 지긋지긋한 인간을 생활관 내 습하고 빛도 잘 안 드는 구석 자리로 유배 보낸 뒤에도 변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열 명이 넘는 20대 초반의 호르몬 덩어리들과 같이 부대끼며 사는 생활관은, LSAT 같은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시험을 공부하기에 최악에 가까운 환경이었다. 게다가 훈련이나 예상치 못한 일정이라도 있는 날이면 자유시간 자체가 통째로 날아가버리기도 했다. 그렇게 아쉬움이 남는 날이면, 나는 할 수 없이 새벽에 몰래 일어나, 그 시간까지 유일하게 불이 켜져 있는 공간인 화장실에 들어가 세탁기 위에 문제집을 펴놓고 몇 문제라도 더 풀어보곤 했다. 그 시간에 뻑뻑한 눈과 멍한 머리로 LSAT 문제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오라는 정답은 안 나오고, 대신 가끔 세탁기 아래에서 쥐가 튀어나와 날 기함하게 만들 때도 종종 있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루에 한두 문제라도 풀어야 내 마음이 편했고, 그 당시엔 그런 시간들마저 즐거웠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변하냐고 물으신다면, 사실 나도 할 말이 없다. 한때 국내 최연소 언론사 CEO로 유명세를 떨쳤던 홍정욱 씨의 '7막 7장'에나 어울릴법한 이런 열혈 공부 일지가, 한때 우리 가족 최고 BABO로 악명을 떨쳤던 나의 그냥 '막장' 인생에도 찾아올지 누가 알았겠는가. 굳이 궤변을 하자면,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라는 것이다. 사회에서는 그렇게 싫었던 공부가, 군대에 가자 그렇게 절박해질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군대에서는 그렇게 즐거웠던 공부가, 다시 사회로 나오게 되자 거짓말처럼 재미가 없어졌다. 풍랑 치는 바다 위에서의 생각과 평평하고 안락한 땅 위에서의 생각은 전혀 다른 모양이다. 원래 사람만큼 안 변하는 것도, 사람만큼 쉽게 변하는 것도 없다지 않는가?




그래도 군대에서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기초를 쌓아둔 덕분인지, 전역하고 나서는 3개월 동안의 시험공부만으로도 준비가 다 된 거 같다는 '감'이 다. 그래서 시험에 '덜컥' 등록했고,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상위 1%에 해당하는 성적을 '덜컥' 받아버렸다. 이 정도면 되려나 하고 로스쿨들에 지원서를 보냈더니, 1 지망으로 생각하던 컬럼비아 로스쿨 (Columbia Law School)에서 합격 통지서가 '덜컥' 나와버렸다. 그렇게 거짓말처럼 몇 번만 '덜컥 덜컥'거리면 종착지까지 단숨에 데려다주는 최신식 초고속 열차에 탑승한 것처럼,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이다. 내가 가는 길이 맞는 길인지 번뇌하고, 번복할 틈 조차 없을 정도로.


결국 내가 로스쿨에 들어와 법을 공부하게 된 데는 딱히 이렇다 할 이유가 없다. 이 긴 글의 제목처럼 정말 "어쩌다"다. 몸을 태우는 소명의식이 있었던 것도, 눈물을 쏙 빼는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물론 남들에게 당당하게 내밀수 있는 명함 같은 그럴 듯 한 이유가 하나라도 있었더라면 좋았겠지만, 그건 진실도, 진심도 아닐 것이다.


법을 공부하게 된 데에 거창한 이유는 없었지만, 그래도 뭔가 공부를 시작하기에 앞서 뭉툭한 각오 하나쯤은 필요할 듯하여 한때 그런 다짐은 했었다.

유유히 흐르는 물처럼 살았고, 또 형태가 없는 물처럼도 살아봤으니, 법을 배우고 나면 나도 이제 한 번쯤은 거칠게 몰아치는 물처럼 세상을 뒤흔들어보자고. 그 다짐 하나만큼은 꼭 이루어보고 싶어 두꺼운 법전들을 눈이 빠져라 읽어나갔고, 그 안에 나열된 활자들을 꾸역꾸역 머릿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머리가 커졌고, 자신감도 생겼다. 이제 이 잘난 법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세상을 한번 뒤집어보자 하고 고개를 자신 있게 들 시간이 온 것이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들여다본 법전 너머의 현실 세상은 내가 상상했던 거보다도 훨씬 더 거대했고, 더 복잡했으며, 더 혼탁했다. 거칠게 몰아치는 건 내가 아니라 요동치는 세상이었고, 거기에 속수무책으로 흔들리는 건 세상이 아니라 나였다.



그래서 이 매거진의 글들은 내가 법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사회의 온갖 부조리들은 일거에 퇴치하는 기록이 아니다. 오히려 요동치는 세상에 대한 기록이며, 그보다도 그 요동치는 세상 앞에서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며 속절없이 흔들리는 내 번뇌의 기록이다. 그 와중에도 법의 가식에 대해서는 냉소적이되, 법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희망을 잃지 않았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는 꿈도 꾼다. 하지만 모든 사회초년생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 흔들리고 쓰러지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다 보면 때때로 이 이상을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이 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금은 그렇게 흔들려도 괜찮지 않을까?


원래 나침반도, 사람도, 그 흔들림 속에서 방향을 찾는 법이니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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