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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규 Oct 09. 2020

우리가 우리가 될 때

<프롤로그>


왜냐하면 실제로 아무도,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그것으로부터 무사하지 않으니까요.

-알베르 카뮈 <페스트>


2020년 경자년(庚子年).


'흰 쥐의 해'라는 의미가 무색하게도 전 세계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검은 쥐' 때문에 홍역을 치렀다. 야생 박쥐가 숙주로 알려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한 것이다.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가 세계 각지로 확산되면서 온갖 혐오와 차별 현상 또한 기승을 부렸다. 이탈리아 북부의 한 술집에선 중국인 청년이 잔돈을 바꾸러 들어갔다가 유리잔으로 머리를 가격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호주에선 중국인 유학생이 길거리에서 무차별 폭행을 당하는 바람에 광대뼈가 함몰되고 실명위기까지 처하게 된 일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지역신문인 <루 쿠리에 피카르(le Courier Picard)>는 "누런둥이 주의(Alerte Jaune)"라는 인종차별적 문구를 1면 헤드라인으로 사용하는 한편,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직접 대본에 적힌 '코로나바이러스'를 '중국 바이러스'로 고쳐 발표하며 노골적으로 중국인 혐오를 조장하기도 했다.


중국인을 향한 반감은 이내 동양인 전체를 겨냥하는 혐오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유럽과 미국 내 주요 도시들에서 아시아계 학생들과 여행객들을 향한 언어폭력 신고가 급증하는가 하면,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도심 한가운데서 집단 폭행을 당하는 범죄 역시 연이어 발생했다. 심지어 당시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경기 연속 골을 터뜨리며 맹활약하고 있던 손흥민 선수도 경기를 마친 후 진행된 인터뷰 도중 잔기침을 하자 현지 팬들의 인종차별적 댓글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서구 국가들에서 행해진 이러한 노골적인 동양인 차별에 대한 우리들의 즉각적인 반응은 분노였다. 국내 네티즌들은 서양인들이 전염병을 핑계로 대놓고 인종차별을 한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유학생 여성 두 명이 무차별 폭행을 당하는 등 혐오범죄가 잇달아 발생한 호주에 대해서는 "역시 범죄자들의 후손"이라든지 "피는 못 속인다"라는 식의 비난 여론이 쏟아졌다.


물론 이러한 분노와 비판의 대다수는 철저히 '동양인' 차별에만 국한된 반응이었다. 심지어 그것조차 모든 종류의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단호한 분노라기보다는 "중국인이 문제일 뿐인데, 한국인까지 부당하게 차별을 받고 있다”라는 식의 억울함 섞인 분노에 더 가까웠다. 실제로 우리는 중국인에 관해선 마치 '흰 쥐'와 '검은 쥐'를 구별하듯 분명하게 선을 그었는데, 그 혐오와 차별의 정도가 서양인들에 비해 결코 덜하다고 보기 어려웠다. 온라인상에선 중국인에 대해 '미개한 민족'이라거나 '민폐 민족', 혹은 '바이러스 그 자체'라는 식의 온갖 혐오성 표현이 난무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중국인들이 일부러 해열제를 먹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다"거나 "중국인들이 무료로 치료를 받기 위해 일부러 한국에 온다"는 식의 카더라식 소식들 또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오프라인에선 중국인들에게 승차거부를 하거나, 배달 서비스를 거부하거나, 아예 한국을 떠나라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길거리에서 한바탕 싸움이 나는 일도 있었다.


초기에 중국인을 향했던 혐오는 얼마 안가 대한민국 내부를 향했다. 대구·경북 지역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가 대거 발생하자 ‘대구 봉쇄론’, ‘대구 포비아’, ‘대구 폐렴’ 등의 부정적인 여론이 퍼져 나간 것이다. 결국 대구·경북 출신 학생들이 수개월 동안 준비한 스포츠대회에서 참가 제한 통보를 받는다거나 대구 출신의 폐암 4기 환자가 서울의 모 병원으로부터 출입금지를 당하는 것과 같은 차별 사례가 잇따랐다. 당시 청와대 국민청원에 글을 올린 한 고등학생은 “질병 하나 때문에 지역감정이 이렇게나 거세질 줄은 몰랐다”며 “대구라는 단어 자체만으로 이미 전국에서는 대구를 심리적으로 봉쇄하고 있다”라고 한탄했다. 마치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등소평의 흑묘백묘론처럼, 우리 역시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만 줄여줄 수 있다면 새로운 혐오와 배제의 대상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것만 같았다.


어디 그뿐인가. 코로나바이러스 국내 확산의 원인으로 지목된 신천지 교회에 대한 혐오는 더 심각했다. 온라인상에서 신천지 교인들에 대해 ‘병마 뿌리고 다니는 벌레’ 라거나 ‘좀비 같은 집단’이라는 혐오 발언들이 쏟아졌음은 물론, 오프라인상에서도 신천지 교인들의 신상 유출로 인한 강제 퇴직, 차별, 모욕, 혐오 피해 등 인권침해 사례들이 속출했다.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신천지의 강제 해체를 요구하는 청원이 올라왔다. 신천지가 설립 이래 지속적으로 일반 기독교, 개신교 등 타 종교의 신도들을 비하하고 심지어 폭력까지 저질렀으며 포교활동이라는 명목 하에 종교의 자유를 침해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밖에도 신천지가 관련 감염자의 치료와 격리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청원에서부터 신천지에 대한 세무조사를 요구하는 청원까지, 정말 다양한 신천지 관련 청원들이 쏟아졌다. 그로부터 몇 개월 뒤, 일부 대형 교회들이 또 다른 대규모 확산의 원흉으로 지목되자 이번에는 일반 교회들 역시 '헌금 욕심에 눈이 먼 장사치'로,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사이비 광신도'로 매도됐다.


이게 끝이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조선족들은 이번에도 역시 집단 혐오의 대상이 되는 걸 피하지 못했는데, "국가 침탈 세력인 조선족들이 한국 온라인 여론을 조작하고 있고, 또 실제로 점령했다"라는 주장이 ‘차이나 게이트’ 혹은 '조선족 게이트'라는 이름으로 온라인상에서 번진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은 점점 힘을 얻어 급기야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삼일절에는 단순히 음모론 수준에 머무르는 것을 넘어 각종 주요 인터넷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라가기까지 했다.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소수자 집단인 성소수자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확진자가 서울 이태원에 위치한 게이클럽에 방문했다는 내용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성소수자들에게 비난의 화살이 돌아간 것이다. 유독 ‘동성애자’를 강조하는 기사 제목과 내용이 일부 언론들에 의해 끊임없이 재생산되자 코로나 예방과 관련 없는 성소수자 혐오를 자제해달라는 몇몇 시민단체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동성애는 '정신적 질병'이자 '사회적 부담'이라는 식의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이밖에도 코로나바이러스 사태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사정으로 사직서를 제출했다는 의료인들, 이 시국에도 불구하고 기부를 하지 않았다고 알려진 연예인과 기업들, 심지어 기부를 안 한 것도 아니고 단지 적게 했다는 이유로 몇몇 연예인들과 기업들까지 혐오의 대상이 된 수많은 사례들이 있으나, 이쯤 되면 검은 쥐가 검은 고양이에게 먹힌 것인지, 아니면 흰 쥐가 흰 고양이에게 먹힌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흰 쥐를 먹은 검은 쥐가 흰 고양이에게 먹혔는데 그 흰 고양이가 결국 검은 고양이에게 먹힌 것인지, 아니 이 모든 난리 속에 정녕 회색 쥐나 회색 고양이는 없었던 것인지, 알 수도 없고 더 생각해봤자 머리만 아프니 이쯤에서 이만 줄이도록 하겠다.


이토록 다사다난했던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를 지금 와서 다시 되돌아보는 이유는, 과연 중국인의 전면적인 입국 금지 조치가 - 중국과의 경제협력 혹은 외교적인 문제 등을 고려하더라도 - 코로나바이러스의 국내 유입을 막기 위해 필수적인 조치였을지에 대한 논쟁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신천지 교단의 반(反)공개적인 조직문화가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악화에 일조했을 가능성을 축소하거나 혹은 확대하기 위해서도 아니며, 이제 와서 중국 공산당의 지령을 받은 조선족들이 여론을 조작해 국론을 분열시켜 왔다는 '차이나 게이트'의 주장이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까지 거짓인지에 대해 따져보기 위한 것 또한 아니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우리'다. 나는 ‘우리’가 누구나 쉽게 안다고 생각하지만 누구도 제대로 알기는 어려운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단순하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우리를 '말하는 이가 자기와 듣는 이, 또는 자기와 듣는 이를 포함한 여러 사람을 가리키는 일인칭 대명사'로 정의한다. 고려대 한국어대사전은 '자기와 함께 자기와 관련되는 여러 사람을 다 같이 가리킬 때, 또는 자기편을 가리킬 때 쓰는 말'로 정의한다. 우리란, 쉽게 말해서 ‘내편’인 것이다.


하지만 내편, 즉 우리가 '누구'인지를 규정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우리는 변치 않는 상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도 볼 수 있듯이 우리의 범위는 굉장히 유동적이다. 다시 한번 위의 예들에서 특정 인종, 국가, 지역, 집단, 개인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확산되고, 또 정당화되었는지를 살펴보자. 처음 '우리 동양인'에게 가해진 서방 국가들의 차별과 폭력에 반대하던 우리는 '우리 국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중국인들을 배척하고 쫓아내도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분명 '우리 국민'의 안전이 최우선이라고 주장하던 우리는, 또 얼마 안가 '우리 지역'의 안전을 위해서는 대구·경북 지역을 희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면서 '우리'의 의미는 '우리 동양인'에서 '우리 한국인'으로, '우리 한국인'에서 또다시 '우리 비(非)대구인', '우리 비(非)기독교인', '우리 비(非)성소수자인'으로 좁아진 것이다. 이렇듯 '우리'의 범위는 상황과 주관적 관점에 따라 너무나도 쉽게 바뀐다.


우리는 또한 포괄적인 것 같지만 동시에 배타적이다. 우리는 우리라는 단어를 마냥 따뜻한 단어라고 생각하기 쉽다. 흔히 끈끈한 결속력, 소속감, 혹은 유대감을 표현하기 위해 쓰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헌법이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이라는 표현으로 시작되고 미국 헌법의 첫 세 단어이자 가장 상징적인 문구 역시 "We the People(우리 합중국 국민은)"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밖에도 일본, 인도, 러시아 등 많은 현대국가들이 자국 헌법 서문에 '우리'라는 단어를 강조한다). “우리가 남이가!”나 ‘미운 우리 새끼’와 같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는 표현 역시 '우리'라는 단어의 결속력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우리'에 소속되어 있는 한, 그 구성원은 못 미덥거나 미워도 어찌 되었든 끝까지 끌어안고 가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그 구성원이 '우리'안에 속했을 때의 얘기다. 마치 “우리가 남이가!”나 ‘미운 우리 새끼’에서 '우리'만 빠져도 바로 ‘남’이나 ‘미운 새끼’가 되는 것처럼, '우리'밖으로 밀려났을 때는 상황이 사뭇 달라진다. 사람들은 자신이 속하지 않은 다른 집단을 쉽게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다. 설상가상 그들에 대한 혐오를 정당화하기도 한다. '우리'와 '그들' 사이에는 원천적인 차이가 있다고 믿고, '그들'이 단순히 '우리'와 다를 뿐만 아니라 열등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을 분리하고 배제하려고 든다. 선을 규정함과 동시에 악이 드러나고 정답을 규정함과 동시에 나머지는 오답으로 치부되는 것처럼, '우리'라는 경계가 생김으로써 그 경계 밖에 있는 '그들'은 악하고 틀린 것으로 치부되는 것이다. 합리성이 결여된 이러한 집단적 분류 및 분리·배제 시도를 우리는 ‘차별’이라고 부른다.


차별이 만연한 사회, 즉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경계가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아마도 지극히 분열된 사회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라는 울타리가 높고 공고할수록 그 경계 바깥에 있는 타인에 대한 이해와 소통의 기회는 그만큼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소통의 단절은 흔히 상대에 대한 오해와 불신으로 이어진다. 그 틈을 파고드는 건 더욱 강화된 편견으로 점철된 '네편'과 '내편'의 논리다. 이런 식의 편 가르기는 객관성에 대한 의무를 덜어주기 때문에 편리한 만큼 합리성을 상실하기 십상이다. 내가 속하지 않은 다른 집단에 대해서 점점 더 독선적이고 편협한 시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는 개인으로서도 큰 결함이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봤을 때도 엄청난 폐단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소속되지 못한 사회의 구성원들은 이러한 부당한 차별과 독선적 시선으로부터 직접적인 피해를 입기도 한다. 사회는 상호 주관적인 공간이다. 그렇기에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들은 자신이 어떠한 속성을 가지고 있든 다른 이들로부터 배제, 혹은 멸시당하지 않고 평등한 대우를 받을 거라는 확신이 필요하다. 하지만 차별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이러한 확신이 자리 잡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이런 환경에서 '그들' 평등한 대우를 받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거나, 아니면 현실과 타협하며 차별이라는 '구조' 바꾸기보다는 그저 자신의 '신분’만이라도 바뀌기를 꿈꾸게 된다. 아예 사회 구성원으로써의 자격을 얻는  자체를 포기하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라는 경계 바깥에서는 울분과 패배감이 쌓여간다.


지금 한국사회에선 이 '우리'라는 좁고 높은 울타리가 너무 많아 보인다. 굳이 위의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일상에서 성별, 장애, 나이, 종교, 가족상황, 학력, 지역,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인종, 정치적 성향, 출신, 등 하나하나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은 요소들로 인해 차별을 당하고, 또 차별을 한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차별에 익숙하고, 또 능숙하다. 하지만 차별이 사회의 결속을 방해하고 평등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 분명하다면, 지금이라도 차별의 문화를 바꿔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우리'라는 좁은 우리 안을 벗어나  넓은 의미의 '우리'  발견할  있을까? 이것이  매거진의 출발점이자  매거진의 모든 주제들을 아우르는 질문이다. 여기까지 정해지자  가지 부분적인 질문들은 오징어잡이 배의 그물에 걸린 오징어들처럼 줄줄이 딸려 나왔다. 나는 우선 리가 차별을 하는 이유, 즉 차별의 뿌리를 짚어보고 싶었다. 우리는  '우리' '그들' 일상적으로 나누는 것일까? 이러한 이분법적 구분은 본능적인 것일까? 이러한 성향을 심화하는 역사적·문화적 요인은 없는 걸까? 이것이  매거진의 ''에 해당하는 질문들이다.


다음은 '언제'와 '어디서'다. 이는 '차이'에 대한 구분이 언제, 그리고 어디서 '차별'이 되는지를 살펴보는 일이다. '우리' '그들' 대한 이분법적 구분은  잘못된 것인가. 때론 차이에 대한 '구별' 필요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구별' 부당한 '차별' 되는 것은 언제, 어디서 일까? 그것을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이것이  번째 장인 <차이에서 차별까지> 구성하는 주제들이다.


마지막으로 '무엇을', 즉 어떤 차별을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남았다. 가장 어렵고, 그렇기에 부담스러운 주제다. 우리에게 알려진 사회 중에서 차별을 완전히 철폐한 사회는 여태껏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별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고 해도, 그것을 줄일 수는 있지 않을까? 개인이 차별하는 걸 막을 수는 없지만, 그에 대한 책임을 물음으로써 차별 행위를 점차 통제할 수는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처벌의 범위는 어디까지여야 할까? 마땅히 처벌당해야 할 차별이 있다면 반대로 용인될 수 있는 차별도 존재할까?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이며, 그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여기까지가 두 번째 장인 <차별에서 처벌까지>가 다룰 질문들이다.


차별은 민감하고도 복잡한 주제다. 그래서 누구나 관심을 갖고 논의해야 하는 주제임에도 누구도 선뜻 건드리길 꺼려하는 주제다. 하지만 우리가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선 차별이란 문제를  이상 기피해서는 안된다.  집요하게 질문해야 한다.  격렬히 논쟁해야 한다.  매거진이  끝이 없는 과정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길 바란다.


앞서 밝혔듯이 차별에 관한 논의는 '우리'에 대한 물음과 맞닿아있다. 그래서 이 매거진은 '우리'에 대한 매거진이고, 조금 더 정확히는 '우리의 정의(definition)'에 대한 매거진이며, 그렇기에 '우리의 정의(justice)'에 대한 매거진이기도 하다.


결국 차별이란 문제에서 '누구'는, 언제나 '우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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