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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현송 Jun 19. 2024

Ground control to Major Tom,

전시 <반응하는 눈> : 빅토르 바자렐리 톺아보기






<빅토르 바자렐리: 반응하는 눈>

2023.12.21 ~ 2024.04.21




글램 록의 아이콘으로 당대 신드롬을 일으켰던 데이비드 보위. 그의 대표곡이라 하면 필자는 단연 'Space Oddity'를 떠올린다.

벤 스틸러 주연의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메인 테마곡이기도 한 이 곡은 첫 소절부터 Ground Control to Major Tom(톰 소령, 여기는 관제소다!)을 외치며 우주 착륙 후 길을 잃은 우주비행사 Tom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스틸컷. [출처=네이버 영화]



앨범 커버의 중앙에 위치한 젊은 데이비드 보위를 덮고 있는, 마치 우주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홀로그램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앨범아트가 바로 빅토르 바자렐리(Victor Vasarely, 1908~1997)의 작품이다.


응? 왜?

우리는 당연히 갑작스러운 두 아티스트들의 콜라보에 의문을 던질 것이다. 한 세대를 흔들었던 데이비드 보위 만큼 빅토르 바자렐리 또한 유럽 미술씬에서 명성을 날리던 미술가였다. 그의 예술세계는 곧장 유럽 대중들에게 트렌디한 것이 되었고, 1972년에는 그의 명성을 보여주듯 프랑스 국민 자동차 '르노'의 로고 디자인도 담당했다.

르노 자동차의 로고 변천사





또한 <Space Oddity>가 발매되었던 1960년대는 인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해였다.

아폴로 계획을 발표한 이후 무수한 사고와 실수를 거듭하다 1969년, 아폴로 11호가 드디어 성공적인 우주 탐사의 출발선에 섰다. 전 세계가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으로 떠들썩거리던 1969년, 그렇지 않아도 파리화단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옵아트(Op-Art)의 창시자 빅토르 바자렐리의 전시가 더욱더 호황을 이루게 된 것이다.

보위의 앨범 커버에서도 보였듯, 작품 속 도형들의 치밀하게 계산된 패턴과 그것의 반복으로 인한 4차원의 표현은 근대 파리의 예술가들과 시민들을 '우주로의 간접체험'으로 밀어 넣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인류의 우주 탐사를 예견하고 미래지향적이라는 평가를 받고자 작품을 만들었을까? 아니면 그저 과학과 광학에 미친, 순수한 예술가일 뿐이었을까?

필자는 그 해답을 이번 <반응하는 눈(The Responsive Eye)> 전시를 통해 찾아내고자 했다.




바자렐리 톺아보기: 광고 디자이너에서 옵아트(Op-Art)의 창시자가 되기까지




바자렐리의 초기 작품,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 <반응하는 눈> 전시에서
바자렐리의 광고디자인 포스터, 1947



바자렐리가 처음부터 옵아트를 시도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헝가리의 바우하우스 학교에서 미술을 수학하며 칸딘스키와 몬드리안의 영향을 받은 화가였으며, 생계를 위해 파리로 건너와 간판이나 광고 디자인을 맡아 그리던 광고 디자이너였다. 파리에서 어느 정도의 명성을 쌓은 그는 1944년 본격적으로 광고 디자인업을 그만두고 화가로써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작품의 방향성을 탐구하기 시작한 그때, 그가 자주 이용했던 지하철역이 힌트가 되어주었다. 파리 14구에 인접한 당페르-로쉐로(Denfert-Rochereau) 역의 타일벽에 영감을 받게 된 것이다. 그는 이끌리듯 자연스럽게 벽면의 정갈하게 나열된 타일들의 과학적 연속성과 빛의 반사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바자렐리만의 '기하학적 추상회화'의 시작을 알리고 있는 셈이다.



현재의 당페르-로쉐로 역. [출처=위키미디어]
이른바 '당페르 시기'에 그린 스케치 중 하나. ETUDE1/ 11(STUDY I/11), 81.7cm X 75.8cm.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바자렐리는 일을 그만두고 휴식을 위해 프랑스의 외딴섬 '벨르 섬(Belle Isle)'에 머물게 된다. 그는 해변에 놓인 자갈의 모양과 파도의 움직임을 기하추상화 했는데, 마침 그 시기 파리에서는 러시아 출신의 화가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 1879~1935)의 전시가 파리에서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말레비치는 1910년대 파리에서 피카소와 같은 '야수파(포비즘)'에 영향을 받은 작가로, 기하학적 추상회화의 대열에 있던 작가였다. 바자렐리는 말레비치의 작품에 감명을 받아 그때부터 기하학적 추상회화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시각적 원리를 연구하기 시작한다.


Kazimir Malevich, The Knife Grinder or Principle of Glittering, 1878-1935



1955년은 그런 바자렐리에게 중요한 해였다. 파리의 저명 미술관 중 하나인 '드니즈 르네 갤러리'가 파리에서 키네티시즘(Kineticism)을 조명할 유능한 작가들을 찾고 있었는데, 그때 관장 드니즈 르네의 요청으로 바자렐리가 제1회 <움직임 The Movement> 전시의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키네티시즘(Kineticism)'은 1910년대 피카소와 말레비치의 야수파에 이어, 사물의 움직임과 인간의 역동적 움직임 등에 초점을 맞춘 예술 운동이다. 이 '움직임'은 빠르게 발전하는 근대사회의 기계화와 공장화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쳐 발발된 운동이었다. 바자렐리가 르네를 만난 1955년에는 이 운동이 다시금 예술 씬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드니즈 르네 갤러리가 파리 화단에서 앞다퉈 키네티시즘 전시를 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인연을 계기로 훗날 드니즈 르네는 바자렐리의 좋은 친구이자 평생의 작품 스폰서가 된다.



<움직임 The Movement> 전시 팜플렛, 한가람 미술관에서
노란 선언문을 싣은 팜플렛 일부, 한가람 미술관에서


이 전시는 뒤샹과 만 레이 등 바자렐리와 뜻을 함께한 작가들과의 협업 전시였다. 같은 목표와 이상을 가지고 참여한 그들은 이 전시를 통해 '노란 선언문(Yellow Manifesto)'를 선언했는데, 거기서 '키네틱 플라스틱(Kinetic Plastic)'이라는 개념을 정의한다. 키네틱 플라스틱 이란, 두 가지의 대비대는 색상의 플라스틱 형태에서 발생하는 착시 현상을 일컫는다. 작품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포착하는 '키네티시즘'을 기반으로, 새로운 형태의 예술인 '옵아트(Op-Art)'가 탄생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빅토르 바자렐리, <Norma>, 1962-1979. 한가람 미술관에서


대조되는 두 색상과 도형 간의 균형을 이용하여 관람자의 눈에 착시를 일으키는 '옵아트'는 보이는 것에 대한 시각적 착각을 활용해 당시 대중들의 인기를 끄는 데 성공했다.


바자렐리는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자신의 작품 세계를 한층 더 강화하는 작업을 시행한다. 그가 기본 개념으로서 사용하는 '플라스틱'에 두 가지의 다른 기하학적 요소와 두 가지 이상의 색상을 통해 추상 예술가들의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킬 '플라스틱 알파벳'을 발명하게 된 것이다. 이는 관람객이 예술가의 의도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보편적인 언어를 만들고자 한 바자렐리의 목적이 십분 반영되었다.



마르상-2, 1964-1974. 한가람 미술관에서
알고리즘의 시기로 들어선 바자렐리의 작품들. 1970년대. 한가람 미술관에서



그가 개발한 플라스틱 알파벳의 개념은 도형과 색상의 조합으로 만들어낸 예술가의 언어임과 동시에 미래 산업의 시각화로써 해석되기도 했다. 그의 예술적 목표가 이뤄지기라도 하듯, 바자렐리는 이후 르노 자동차를 포함하여, 영화 박물관 등의 기관이나 업체의 로고 작업을 맡기도 했다.


미국 정부가 아폴로 계획을 발표한 이후인 1960년대 중반부터는 약 20년의 시간 동안 세포 구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인간의 신체나 우주의 은하계 등 알 수 없는 돌연변이로 인해 발생한 생물학적 미스터리를 플라스틱 알파벳의 변형과 움직임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베가 200(Vega 200), 1968
(왼) 판더락, 1982 (오) 노란테니스선수, 1987


한국에서도 바자렐리의 위엄을 알릴 수 있었던 전시의 원천이 1965년 뉴욕에서 열린 <반응하는 눈 The Responsive Eye> 전시였다. 그는 이 두 번의 전시를 통해 유럽과 미국 화단에 완전히 각인되었고, 1997년 프랑스 센에마른에서 사망하기 전까지 자신의 이름을 건 재단과 센터를 건립하는 등 성공적인 사업가이자 예술가의 여생을 지냈다.


보이는 것의 착시 효과를 일으키는 '옵아트'는 단순히 예술의 영역을 넘어 미래지향적인 실험정신과 수학적 계산이 동원된 그야말로 '현대'의 미술이었다. 바자렐리가 평범한 광고 디자이너에서 20세기 저명한 예술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시대의 흐름을 읽는 대중적인 작가가 되기 위해 작품을 완성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일상의 작은 규칙들을 눈여겨보고 그것을 화폭에 담아내며 자신만의 철학을 차근히 쌓아갔고, 그런 그의 철학이 '달 탐사 프로젝트'로 한껏 달아오른 대중들의 니즈(Needs)를 관통했을 뿐이었다.


1960년대는 유럽과 미국의 작가들 뿐만 아니라, 당시 파리 화단에서 유학 중이던 한국작가들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던 중요한 시기이다. 인류에게 더 이상 우주가 상상의 공간이 아니게 된 그때, 예술가들은 우주 탐사에 대한 갈망과 열정을 자신의 작품에 녹여냈다.


2024년 현재에도 여전히 아무나 달에 갈 수는 없지만 우주 탐사에 대한 희망은 여전히 인류의 마음속에 '미래'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상상이 현실이 되는 그날까지, 인류가 미래를 향한 갈망을 멈추지 않는 한 바자렐리의 예술은 끊임없이 조명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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