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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미 Nov 25. 2022

전쟁 속에서 아군을 발견했다

기꺼이 뒷배가 되어주는 아군의 탄생

즘 동생에게서 자주 전화가 온다. 근래 내가 꽤 걱정되는 모양이다.


통화 내용은 평범해서 수상하다. 새삼 카톡도 안 하던 동생이 나에게 오늘은 뭐했냐, 낮에는 뭐했냐, 지금은 뭐하냐 꼬치꼬치 묻는다.


"뭐해"

"드라마 보지"

"무슨 드라마"

"멜로가 체질. 벌써 10화야. 멜로가 체질 알지?"

"알지. 나 피자 사서 들어가는 중"


이러면서 자기가 산 피자가 어디에서 산 무슨 피자고, 얼마 짜리고 하는 이야기를 묻지도 않았는데 늘어놓는다. 집에서는 게임하느라 뒤통수만 보여주던 놈이 하루 걸러 전화를 걸어온다. 통화대기화면에 동생 이름이 뜨는 광경이라니.


요즘 동생의 행보가 꽤 다정하다. 지난주에도 회사 가기가 너무 힘들어서 집에서 무섭다고, 힘들다고 툭툭 뱉어뒀는데 그때 동생은 얘기했다.


근데 누나는 그만두면 안 되지.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인데

그만두면 안 되지.


copyright. @s.park.film


내가 6살이 된 겨울에 동생이 태어났다. 여동생이 태어날 줄 알고 매일 색종이에 "언니야~" 하면서 편지를 썼는데 태어나고 보니 남동생이었다(중간에 엄마가 나한테 남동생이라고 말해주셨던 것 같은데 개의치 않고 계속 여동생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시뻘건 못난이가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게 정말 마음에 안 들면서도 동생을 많이 좋아했다. 남자치고 예쁘기도 했고. 왠지 아군 같았다. 언젠가 우리가 돈독한 동맹을 기반으로 함께 세상을 헤쳐나가야 할 동지라는 사실을 어린 나도 대충 알고 있었나 보다.



내가 초등학교 졸업 학년이 됐을 때, 동생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어리고 작은 동생은 또래가 모여있는 자리에서 늘 조용했다. 친한 친구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아이들과 어울리는 모습이 못내 어색했다. 그런 동생이 걱정돼서 학교에서 동생을 보면 멀리서 쳐다보기도 하고, 6학년짜리 누나가 있으니까 괴롭히면 안 된다고 알려주고 싶어서 동생 반에 대뜸 찾아간 적도 있다. 친구들을 대동하고 동생 반에 가서 괜히 몇 마디 걸고 나오기를 시전했다는 소리다. 종종 하교하는 동생을 데리러 간 적도 있었다. 동생을 기다리는 시간이 그렇게 설렜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작은 남자아이가 버스에서 내리는 장면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몸집에 비해 커서 헐렁거리는 흰색 도복을 입고 버스에서 내리는 동생. 상체를 덮고도 남을 녹색 책가방을 들고 제법 익숙하게 횡단보도 앞에 서있었다.


집에 오면 동생에게 한참을 꼬치꼬치 물었다. 오늘 누구랑 얘기했는지, 친한 친구는 누구인지, 선생님이랑은 어땠는지, 수업이 어렵진 않았는지. 요즘 동생과의 통화에서 희미한 기시감을 느끼는 건 그때의 기억 때문일 수도 있다.


늘 작았고 어렸고 나의 뒤를 천천히 따라오던 동생이 어느새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고 있다. 우리는 한 번의 큰 싸움을 거쳤고 그 일로 1년 넘게 서로 대화하지 않았다. 불과 2년 전의 일이다. 그 차가운 시간을 깬 건 한 마디였다.


"볶음밥 먹을래?"



그날 재택을 하느라 집에 있었고, 점심밥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집에 있는 건 동생과 나 이렇게 둘 뿐이었지만 동생을 위해 밥을 준비해줄 생각은 없었다. 빨리 내 밥만 해서 먹고 쉬다가 일할 생각이었다. 한쪽 화구에서 계란 프라이를 하려고 팬에 기름을 둘렀는데 왈칵 기름이 쏟아져 나왔다. 흥건한 기름을 보고 '에라이 계란 두 개는 할 수 있는 양이네' 라고 생각하다가 집에 있는 또 다른 입이 생각났다. 방에 콕 박혀 있는 동생. 그 길로 걸어가 동생 방 문을 열었다(1년 반 만에).


동생이 얼떨결에 "어"라고 대답하던 표정이 기억난다. 아닌가 고개를 끄덕였던가... 명확한 건 그의 변을 들어봐야겠지만, 왜곡됐는지 미화됐는지 동생 얼굴에는 정말 많은 감정이 지나갔다. 놀람, 어이없음, 어안이 벙벙함, 예기치 못해 당황스러움, 배고픔(?) 그리고 반가움. 동생은 "어"라고 대답하자마자 방에서 나와 밥 준비를 거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1년 반 만에 식탁 앞에서 냉전을 종결했다. 그 뒤로 동생은 꽤나 나를 챙겼다. 자연스럽게 평화조약이 체결됐다. 서로의 아군이 됐다.


우리의 냉전이 금방 끝날 수 있었던 이유는 서로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많은 것을 갖고 태어나지 않았고 지극히 평범하기에 서로의 뒷배가 돼줘야 한다는 것.


아니다. 이게 아닌 것 같다. 우리는 많은 것을 갖고 태어났어도 서로가 필요했을 것이다. 험준한 산턱을 넘어가는 데에 필요한 게 꼭 대단한 장비만은 아니니까. 우리는 냉전을 통해 서로가 서로의 기초체력이 되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언제든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든든한 감각이 살아가는 데에 가장 중요한 기초체력이 되고 있었다. 동생과 남처럼 지낸 1년 반 동안 나는 어딘지 위태로웠다. 당장 무너지진 않더라도 미래에 내가 무너졌을 때 기댈 곳이 마땅히 없겠다는 위기감. 잃고 나서야 그 사람이 적군이 아닌 아군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동생도 비슷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의 종전은 순조로웠다. 냉전을 종결하고 싶어 한 두 사람에게 필요한 건 핑계나 타이밍 정도였을 것이다.


요즘같이 마음이 쓰라리고 심리적 자원이 부족한 때에 지원군의 등장이 유독 반갑다. 동생에게서 전화가 오면 10분 ~ 20분 정도 통화를 한다. 소소하고 별 말 아닌 대화가 오간다. 이 통화의 진가는 휴대폰을 내려 놓은 뒤에야 빛을 발한다. 짧은 통화가 일상을 지탱하고 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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