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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수림 Nov 22. 2021

야, 왜 너는 아닌 척해?

잘 돼가? 무엇이든 (이경미, 2004)를 보고

‘신이시여, 제발 저에게 이런 인물과 엮일 일이 없기를 바라고 또 바라나이다.’     


좋은 일이 있을 땐 안중에도 없다가 안 좋은 일이 닥칠 것 같다 싶으면 부리나케 신을 찾는 얄팍한 인간인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오랜만에 두 손을 모았다. 제발 일터에서 희진이를 만나지 않게 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영화는 36분이면 끝나지만, 인생은 아니잖아요?     


나를 기도하게 만든 이 짧은 영화의 소개는 다음과 같다.      


"주성쉬핑"에 입사한지 4개월 된 경력 3년차 지영은 책임감 있고 영리하여 박 사장으로부터 신임을 받고 있으나 정작 본인은 사회생활에 신물이 난 여직원이다. 한편, 지영보다 2살 어리지만 이 직장에서 3년 넘게 일해 온 희진은 일 욕심이 많고 노력파이나 눈치가 없어 주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너무 다른 성격과 행동양식 때문에 서로에 대한 안 좋은 감정만 쌓인 두 사람에게 어느 날 박 사장으로부터 비밀업무가 주어지고 이로 인해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매일 밤 같이 야근을 하게 되는데.. (출처 : 네이버 영화 소개)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지영의 편이 되었다. 원래 일이란 효율적으로 빠르게 하는 것이며, 이 회사는 나의 정착지가 아니고 잠시 지나가는 곳이며, 나는 이런 데 계속 있을 사람이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는 지영이는 꼭 나의 속내를 투영한 사람 같았다. 나는 글을 쓸 거라고 하는 말까지.      

희진은 지영이 글을 쓸 거라고 말해도 대꾸도 없이 자기 일이나 한다. ‘어떤 글이요?’ 정도의 관심은 아니더라도 ‘그러시구나’ 정도의 반응도 없이 깔끔히 무시하고서 사장이 지시한 탈세 작업을 성실히 이어간다. 눈치 없이 우직하고, 우직하다 못해 요령도 없이 속 터지게 하는 희진과 일로 계속 엮이는 지영은 짜증이 치민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일 함께 있어야 하는 일터의 동료가 나와 일하는 방식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르고, 그것도 사장 앞에서는 내가 그 사람보다 일을 못 하는 걸로 비춰지게 만든다면? 나는 씩씩대면서 말할 것이다.      

“야, 왜 너는 아닌 척해?”

너도 사장 아니꼽잖아. 이 일이 탈세인 거 알고 있잖아. 그리고 네 방식이 진짜 시간 오래 걸리고 비효율적인 건 정말 모르는 거니,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니?      


물론 나는 속으로 뒤통수를 째려보면서 상상 속으로 쏘아붙이고 회사 화장실 문이나 거칠게 열어 재끼며 소심하게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화풀이를 하겠지만. 그리고 문을 걸어 잠그고 익숙한 어플을 열 것이다. 사람인, 잡코리아, 자소설닷컴 등등. 짜증나게 익숙한 그 화면의 스크롤을 내리며 여기 아니면 갈 데가 없을 것 같냐,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러나 삶은 바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영화가 아니고, 나는 그렇게 화장실 칸에서 분노하다가도 내가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운 것을 상사가 알아채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 다시 희진이 옆에서 타자를 두드려야 한다. 그날의 야근도 나란히 앉아서 할 테고.     


나는 이런 상상을 FULL HD 화질로 머릿속에 그릴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기에 영화를 보면서 자연스레 두 손을 모으게 된 것이다. 제발 희진이를 일하는 곳에서 만나지 않게 해주세요. 일터에서만 만나지 않으면 저는 희진이를 미워하지 않을 거예요. 어쩌면 우리는 의외로 잘 지낼 지도 몰라요. 빼도 박도 못하는 곳에서만 만나지 않게 해주세요, 하고.     


희진은 악의가 없어서 더 상대방의 뒷골이 땡기게 하는 인물이다. 나도 분명 만난 적이 있다. 단체생활 혹은 조직생활 속에서 '아니 그게 아니고...''아니 이렇게 답답할 수가...''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이런 생각이 들게 했던 인물과 함께 무언가를 해야만 했던 일들이. 그리고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내가 뭐라고 남을 이렇게 여기는지 죄책감이 들어 스스로가 나쁜 사람처럼 느껴졌던 일들이. 

정말 내가 뭐라고. 얼마나 잘났다고.      


여기까지 나는 내가 일을 아주 효율적으로 척척 해내는 사람인 것처럼, 논리정연한 사람인 것처럼 잘도 써놨다. 정말로 비효율적인 걸 답답해하고 성격이 급한 건 맞다. 그렇지만 일을 그렇게 잘한다고? 네가 잘하면 얼마나 잘했는지 생각해 보라고 하면 나는 할 말이 없다. 글쎄요, 민폐는 안 끼쳤다고 생각하는데... 하고 웅얼대기나 할 것이다. 이제는 내가 아까 상상 속 희진이에게 했던 말을 자신에게 돌려줄 차례다.     


“야, 왜 너는 아닌 척해?”     

나도 누군가의 희진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는 저 맹한 애와 같이 엮이지 않게 해주세요, 이렇게 빌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말은 그럴싸하게 하지만 사실 능력은 별로 없는 애랑 같이 프로젝트를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사람도 갑갑한 마음을 다스리며 나와 어떻게든 일을 마무리 지었을 것이다. 자신이 타인을 답답하게 만든 일까지는 잘 보관하지 않는 간사한 기억 체계를 가진 인간으로서 나는 지금까지 영화 속 희진이를 잘도 미워한 것이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나라는 사람의 인간성에 의구심을 품게 된다. 그렇지만 나는 진심으로 좋은 동료가 되고 싶고,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쪼잔하고 나만 아는 인간으로 영원히 남고 싶지 않다. 고로 나는 다짐하겠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동지애를 나누는 동료가 되겠다고. 나는 대인배가 아님을 인정하고, 일 때문에 오전에는 옆자리의 너와 갈등을 겪었어도, 오후에는 내 주머니 속의 마이쮸나 비타민 젤리를 나눠주겠다고. 

무엇보다 네게 섣불리 기대하고 실망하지 않고, 이런 사람도, 이런 사이도 있음을 받아들이겠다고. 내가 살아가는 세상은 네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임을 잊지 않겠다고.     


그리고 오만하게 너를 쉽게 미워하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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