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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마이너 Jul 25. 2021

변호사도 디지털 노마드가 될 수 있을까?

개업 세달만에 예전 월급 몇배를 찍고

<내 법대로 산다> - 일 편






개업  자리잡기  이상의 결과

 

누가 시킨 것은 아니지만 개업 후 자기를 잡기 위해 로펌 다닐 때 못지 않게 열심히 일을 했다. 상담활동을 계속 하고 하루에도 몇 통씩 걸려오는 전화에 응대하고 하다보니 사건을 꽤나 많이 수임하게 되었다. 미친듯이 일하다보니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르게 벌써 몇 달이 금새 지나있었다. 어느새 사건수가 로펌에 있을 때 어쏘 변호사로서 가지고 있었던 사건수와 얼추 비슷해져 있었다. 정산을 해보니 월매출은 예전에 로펌에 다닐 때 월급의 몇배 정도에 이르고 있었다. 자리를 잡는 것을 넘어 회사를 그만두고 약 1년간 백수로 지낸 시간을 바로 만회하는 성과였다. 


주위에서는 이렇게 잘 될 때 어쏘 변호사를 구해서 업무를 맡기고 사건 수임을 계속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사무소를 확장시켜가는 거라고 했다. 사실 지금의 월매출 정도면 혼자서 하기엔 버겁고 비효율적인 정도이고 어쏘 변호사를 구해야 하는게 맞을지도 몰랐다. 1년 전만 해도 어쏘 변호사였던 내가 개업한지 3달만에 다른 어쏘 변호사를 고용해야 하나 고민하는 낯선 상황이었다. 생각해보면 사람들 말대로 어쏘 변호사를 구해서 일을 맡기고 나는 업무를 덜고 그 시간을 오로지 사건 수임에 기울인다면 계속 성장해서 어쏘 변호사도 한명 두명 늘고 사무소도 커질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나는 대표 변호사로서 어쏘 변호사들 관리만 좀 하고.. 앞으로 이렇게 쭉 간다면 연매출도 수억원에 이를테고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는 경제적 자유을 생각보다 일찍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런 달콤한 상상에 빠져들었다. 


그 생각에 잠시 혹하긴 했지만 마음은 복잡했다. 단기간 성취에 취한 나머지 월 수임건수, 수임액 등 수치에 집착하고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고 입안에 도토리가 있는데도 미친듯이 도토리를 모으는 다람쥐처럼 욕심이 내 마음 속에 들어왔다. 내 스스로 느끼기에 건강한 마음상태는 아니라고 진단을 내렸다. 그래서 엑셀을 밝는 대신 오히려 잠시 브레이크를 밟기로 했다. 앞으로의 방향을 재조정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 다가올 재판기일까지 짧은 방학을 가지기로 했다. 상담도 수임문의도 꺼놓고 아내와 함께 제주도로 떠났다.   


그러다 체할라...




항로를 재설정하다 


여행을 다니며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다시 생각하며 항로를 재설정하는 시간을 가졌다. 어쏘변호사를 고용해서 로펌을 키우는 방안에 대해서는, 그리고 조직을 만들어 키울 만큼 나에게 야망이 있는 것 같진 않았고 극심한 개인주의자라 직원을 고용하면 직접적으로 일하는 시간은 줄어도 신경쓸 일이 많고 피곤해질 것 같았다. 내가 어쏘 변호사로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는데 같이 성장할 수 있는 여건을 심도있게 고민하지 않은 채 내 이익을 위해 함부로 어쏘 변호사를 고용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말며 누구도 고용하지 말라’는 숫타니파타의 말씀이 좋은 핑계가 돼주었다. 


홀로 개업해서 직원 몇십명을 거느린 거대한 법무법인으로 성장하는 것도 나름 노력에 의한 뿌듯한 결과이겠지만 내 마음이 끌리는 방향은 아니었다. 그건 너무 뻔해서 내 방식은 아니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예상하는 방향보다는 전통과 달리 내가 원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일을 해나가고 싶었다. 아니 그를 넘어 보수적이고 편견이 많은 법조직역에서 이렇게 특이하게도 할 수 있다는 어떠한 사례를 만들어서 보란듯이 증명하고 싶었다(공유오피스에서 개업을 하는 것, 뒤에서 말하듯 디지털 노마드로 일하는 것 등등). 이런 생각을 퍼뜨려서, 그래서 나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 자신이 이상한 거라고 눈치보지 말고 용기를 얻어 자신의 방식으로 일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보수적인 관습에 맞서 점차 새로운 흐름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 그게 내가 변호사로서 법조계에 기여할 수 있는 방향이라고 생각되었다. 




변호사도 디지털 노마드가   있을까?


막상 제주도로 떠났지만 그렇다고 마냥 여행만 다닐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담당하는 사건들의 업무가 남아있었기 때문에 중간중간 업무를 봐야 했다. 이 참에 예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관련 모임에도 나가곤 했던, 디지털 노마드 생활을 부득이 잠시 경험하게 된 것이다. 


변호사시험이 끝나자마자 며칠 후 나는 바로 가벼운 배낭 하나를 매고 훌쩍 회사 입사일까지 몇 달간 남미 배낭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떠나는 당일날 묵을 숙소도 정하지 않은 완전한 무계획 여행이었다. 그곳에서 넓은 세상을 보고 많은 친구들도 사귀었고 그때가 인생 최고로 해방감을 누리던 시기였다.   


그때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시내 투어를 하면서 미국인 친구와 어울렸던 적이 있는데 그 친구와 세비체를 먹으며 대화해보니, 직업이 회계사인데 여행을 다니며 노트북으로 일을 한다는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다. 그 친구가 바로 노트북만 들고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세계를 여행하면서 일을 하는 신세대 워킹족, 디지털 노마드 였던 셈이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자연스럽게 노마딩에 관심이 많아 백수가 된 이후 노마드 관련 모임에도 나가보았지만 거의 개발자, 웹디자이너, 사업가 등이었고 변호사 등 전문직은 볼 수 없었다. 변호사는 노마딩이 불가능한 직업일까, 변호사도 원하면 디지털 노마드가 될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 그런데 이번 제주도 여행이 이런 디지털 노마드 생활을 실험해볼 적기라고 생각됐다. 


변호사도 노마딩이 가능할까?


어차피 예전처럼 하루 종일 여행지에서 쏘다닐 체력도 아니고 제주도에 여러 번 왔었기 때문에 꼭가고 싶은 곳만 여유롭게 다니고 중간에 카페에서 쉬는 시간, 일찍이 숙소로 돌아온 시간을 활용하여 업무를 틈틈이 하였다. 그래서 야외 카페에서 성산일출봉을 바라보며 고소장을 쓰기도 하고 저녁에 호텔 로비나 비즈니스센터가 있으면 거기에서 의견서를 쓰기도 했다. 


이곳 저곳의 사무실


처음에는 여행다니면서 업무가 잘 될까?란 걱정도 내심 있었지만 막상 실제로 일해보니 일을 하는 데 큰 지장은 없었다. 재판이나 조사 등 직접 가서 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면 서면을 작성해서 제출하는 일은 어디에서나 가능했다(민사사건은 전자소송 제출, 형사사건은 우편으로 미리 제출). 이렇게 서울과 떨어져 제주도에서 일하면서도 문자, 메일, 전화를 통해 고객들과 즉각적으로 소통할 수 있었다. 몸소 노마딩을 경험하게 되면서 내 마음이 일에 집중만 할 수 있다면 일을 하는 장소는 중요하지 않다는 점을 깨달았다. 


사실 변호사는 외부 일정 외에는 노트북만 있으면 어디에서나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이다. 한마디로 그냥 노트북을 열고 워드프로세서를 킨 다음 서면을 쓰면 된다. 그 공간이 꼭 고정된 사무실이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노트북 하나만 있으면 어디에서든 일할 준비가 되고 바로 그 곳이 사무실이 된다. 


코로나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주었다. 코로나로 인해 회사에서는 재택근무를 강제로 실시하게 되면서 재택근무에 대한 오해와 걱정도 많이 바뀌고 있으며 화상회의 등 오프라인에서 일어난 일을 온라인으로 대체하고 있다. 이러한 온택트 열풍은 디지털 노마드가 성장할 수 있는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줄 것이다. 개인적으로 수도권 인구 편중, 그리고 인한 부동산 가격 폭등과 투기, 교통난 등 직장이 한 곳에 몰려 있어서 생기는 문제들을 바로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할 수 있는 노마딩 문화가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도 코로나가 풀리면 디지털노마드 변호사로서 노마딩을 적극적으로 영위해보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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