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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채로운 윤슬 Mar 13. 2024

씁쓸한 첫 퇴회

다들 이렇게나 바쁘게 살았던 걸까

학습지 방문 교사 일을 시작하고 몇달간 퇴회 없이, 아니 오히려 입회를 받으면서 승승장구했다.


교육받을 때는 실적이 좋은 다과목을 하는 선생님들이 참 대단해보였는데,

내가 실적이 느는 것을 보니

'아, 이건 내 능력으로 판가름나기보단 운이 크구나'를 느꼈다.



실적은 내 능력 밖의 일이라지만

최선을 다해 일 했다.

하루라도 빨리 적응해서 안정적으로 일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주말이고 휴일이고 없었다.

학부모님들은 휴일에도 연락을 주셨고

나는 혹시나 빠진 게 없나싶어 휴일에도 앱에 접속해 아이들 진도를 더블 체크하고 교재 주문을 넣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시간 외에도 신경 쓰고 준비해야하는 것들이 많아서 이 일이 맞나 회의감이 자주 들었지만

아이들을 보러가면 매주 성장하는 모습이 보여서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지난주에 못 풀던 문제가 풀리고

새로운 것을 보며 눈을 반짝이는 아이들이 참 이뻐보였다.



사회에서 만난 어른들은 가면을 쓰고 스스로의 약한 모습을 숨기기에 급급한데, 아이들은 솔직하고 순수했다.

느끼는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며 본인이 가진 색깔을 여과없이 보여주었다.

아이들의 순수한 모습을 보며 나도 잊고 있던 나의 감정들을 되찾곤 했다.



10분 단위로 움직이는 스케줄이다보니 시간에 계속 쫓겼다. 연락 오는 곳은 많은데 수업중이라 답하기 쉽지 않았다.

예전에는 연락을 늦거나 잊는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다들 이렇게나 바쁘게 산다고 정신이 없었구나 싶었다.


빠듯하게 짜여진 스케줄을 느슨하게 만들고

아이들에게 할애하는 시간을 조금 더 늘렸다.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가진 특성을 살펴보고,

장래희망이 무엇인지, 무슨 과목을 가장 좋아하는지 물어보았다.

그리고 그 아이의 문제풀이 실력을 보며 진도를 대대적으로 조정해나갔다.


반복적인 문제풀이에 지친 아이를 보고 새로운 진도를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니 오답률이 현저히 줄어드는  현상을 보면서 신기했다.


"선생님이 내 졸업식 왔으면 좋겠다"


작고 귀여운 예비 초등학생인 아이가 말했다.

나를 가깝게 생각해주는 것 같아서 고마웠다.

근무시간이랑 겹쳐 가진 못했지만 작은 카드에 편지를 써 꽃다발과 함께 그 아이 집 현관문 앞에 두고 왔다.


나도 어릴 때 받았던

선생님의 카드를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으니까.

선생님의 한 마디를 가슴에 새기며 살아왔던 나였기에 아이들에게도 그 한 문장 한 문장이 얼마나 소중한지 익히 알고 있었.







주2일 업무량을 받았는데 어느새 4일로 늘어나 있었다.


영업이 의무가 아니라는 소리를 듣고 시작한 일인데, 전단지 작업도 하고 과목 추가를 위한 영업을 해야 했다. 그래, 의무는 아니었다. 하지만 일에 욕심이 생긴 나한텐 의무로 다가왔다.


회사에서 사무직을 할 때보다 업무더 많았지만

수입은 적었다.


돈 벌기가 이렇게 어려웠나, 싶었다.

첫 월급을 받고는 그 돈이 너무 아까워서 한동안 쓰지를 못했다.(쓰지 않아도 무방할 만큼의 적은 금액이기도 했다)


내가 여태 돈을 참 쉽게 벌어왔구나, 싶었다.

돈을 물 쓰듯 썼던 내 자신을 되돌아봤다.

어렵게 번 돈은 쉽게 나가지 않았다.


월급을 더 받고 싶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했다.

수업 시간에 열정을 다 했고, 아이들의 수업태도가 좋아짐을 보며 보람을 느꼈다.


힘들어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곧 잘 따라와주었다.


생각보다 힘든 일에 한숨이 쌓여갔지만 아이들을 보는 게 힐링이었다.

'일하러 가야지'가 아닌

'누구보러가야지'하는 기쁜 마음으로 수업을 하러갔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보람은

아이들이 고사리같은 손으로 선물 줄 때다.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준 것일테니까.



입사하고 얼마지나지 않아 인센티브를 받다.

나의 노력이 빛을 발하구나싶었는데

점차 몸과 정신에 이상이 생겼다.


몸살이나고,

숨이 안 쉬어지고,

심장이 미칠 듯이 뛰고,

정신이 아득해지고.



사실 아이들이 예뻤지만

학부모의 과한 요청에, 과한 관심에,

아이들의 장난을 받아주는 게

점점 버거워진 건 사실이었다.



모든 이들에게 맞려 애썼는데,

는 그저 기준없이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새로운 아파트 단지를 맡기로 했지만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결국 그러지 못 했고,

정말 신경 많이 쓰던 아이가 그만둔다는 소식을 들었다.


학부모님들은 불편한 이야기는

선생님에게 직접하지 않았다.

관리자를 통해 듣게 했다.


돌아보니

나 또한 불편한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나약한 선생일 뿐이었다.


그 아이를 볼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니 조금 더 재미있게 수업해야했는 후회가 되었다.


왜 그렇게 아이들의 성장에 목을 맸을까.

그저 일주일에 2-30분 보는 일개 학습지 선생일 뿐인데 아이의 인생을 바꾸겠다고 경주마처럼 달려왔던 시간이었다.


인생은 장거리 마라톤인데

왜 매번 단거리 달리기를 하고 지치는 지,

앞으로는 아이들의 성장에만 집중하기보다는 즐겁게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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