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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상평상 Apr 13. 2024

돼지우리



라디오를 듣는다.



"좋아하는 음악과 함께 지금 무얼 하고 계신지 사연들을 올려주세요."



잠깐의 광고시간 후에 여러 가지 사연들에 대한 소개가 시작되었다.



"아침 일찍 투표를 마치고 그간 바빠서 미뤄 두고 있었던 우리 집 돼지우리를 청소하고 있습니다. 만만치가 않아 힘이 드네요. 추천하는 음악은 황규영의 '나는 문제없어.'입니다."



잠시 후, 오래전 내 등굣길에 힘을 주곤 했던 빠른 템포의 그 노래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들어서였을까? 그때는 제법 신나고 빠르게 들렸던 멜로디가     이상하게 처지는 느낌이다. 마치 세월을 정통으로 맞아 축 늘어진 내 뱃살 같다. 알아듣기조차 힘든 빠른 템포의 요즘 노래에  너무 익숙해진 탓도 있으리라.



"네. 축사를 운영하시는 아무개 씨께서 신청하신 음악이었습니다."



"풉!"



아이스커피를 먹던 나는 라디오 DJ의 멘트에 커피를 뿜을 뻔했다.



내가 이해한 사연 속의 돼지우리의 의미와 그녀가 이해한 돼지우리의 의미가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녀와 달리 나는 돼지우리라는 말을 들으며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방을 비유한 것으로 단정다. 물론 그것은 그녀의 멘트를 듣기 직전 열린 방문 사이로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진 아이들의 방을 마주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커피가 묻은 입술 위로 실소가 흘렀다.



한편 나는 사연자가 '나는 사실 축사를 운영하는 사람이 아니라 돼지우리는 그저 지저분한 아이들의 방을 비유한 것.'이라는 정정 사연을 다시 보내올 것을 예상하였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라디오 프로그램은 그대로 끝이 나고 말았다.



사람의 생각과 판단이란 것은 실제의 사실과는 무관하게 그때그때 그가 처한 상황과 인식한 정보의 양과 질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듯하다. 한마디로 인간의 생각이란 것은 실제나 실제에 가까운 무엇이라기보다 우리의 뇌가 순간순간 제 멋대로 만들어낸 망상일 가능성이 높다. 세상을 마주할 때 우리가 겸손해야 하는 이유이다.


정보를 받아들이는 매 순간마다 우리는 우리의

판단과 생각을 걷어낸 체 있는 그대로 인식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는 붓다가 얘기했던 위빠사나 명상과도 맥이 닿아 있다.


하지만, 인간이란 존재인 이상 우리의 인식에서 생각과 판단을 걷어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어려운 일이다. 물론 수행의 경지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보통의 경우, 우리의 생각과 판단은  보고 듣고 느끼는 인식기능이 작동하는 순간 본능처럼 달라붙는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우리의 생각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겸손의 자세는 이 지점에서 요구된다. 우리는 우리의 판단이 언제든지 잘못될 수 있음을 마음에 새긴 체 열린 마음과 낮은 자세로 외부정보를  인식하려 노력해야 한다.


만약, 이와 반대로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믿는다면 어떻게 될까? 자신의 판단 외에는 모두 잘못이라는 생각은 신념과 믿음이 되어 결국 스스로를 오만과 불통의 늪에 빠뜨릴 것이다. 급기야는 주위 사람들까지도 불행의 늪으로 끌어들이고 말 것이다.


타인의 의견을 열린 마음으로 듣는 유연한 태도는 특히, 리더의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더욱 요구된다. 리더의 판단과 행동의 영향력이 그만큼 광범위하게 작용하는 까닭이다. 특히, 자신과 반대의 입장에 있는 의견일수록 들어 보려고 해야 한다. 이와 같은 열린 태도는 당장 의견의 합치를 끌어내지 못할지라도 소통의 물꼬상대의 공감과 양보 정도까지는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오직 자신만이 옳다고 하는 신념과 오만은 정치와 경제체제를 파괴하며 혼란과 충돌을 야기시켜 때때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마저 빼앗곤 한다. 최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크고 작은 전쟁들은 그러한 경향을 더욱 반영하고 있다.


겸손이

리의 삶에서

도덕 명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인식과 사고를 위한 출발점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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