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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디트 Nov 09. 2020

완벽한 얼음 트레이가 필요해

안녕, 나는 음식과 술에 관련된 콘텐츠라면 뭐든 쓰고 찍고 버무리는 에디터 손기은이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그런지 요즘 퇴근하는 시간이 확 앞당겨졌다. 스산하고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며 퇴근하기에 내 마음은 이미 너무 추우니까…. 최대한 땅의 온기가 남아있을 때 일찍 퇴근해 저녁을 얼른 먹고, 소파에 블랭킷을 휘휘 두르고 앉아 후식으로 마실 술을 한 잔 손바닥에 감싸 쥔 뒤 일단 뇌를 오프 시킨다.

이 시간에 술을 마실 땐, 주로 독특한 향이 팡팡 터지는 술을 고른다. 잠들기까지 긴 시간이 남은 터라 몸과 마음이 폭 안기는 듯 익숙한 향보다는 훨씬 더 재미있는 술이 좋다. 씁쓸한 풀 맛이 묵직하게 감도는 아마로(Amaro)나 향이 쨍하게 살아있는 그라빠(Grappa)도 훌륭하다. 얼음 위에 조금 붓고 코를 한참 적응시켜야 목 뒤로 넘길 수 있는 이색적인 향의 술 한잔이, 무료한 나의 저녁을 꽉 채워준다.

그동안 독특한 향의 술은 주로 해외 출장을 통해 공수했다. 스스로를 혁신적이며(Progressive), 풍미에 집착하는(Flavour-Driven) 증류소라고 소개하는 에딘버러의 스윗드램(SweetDram)이 만든 술들은 모두 황홀했다. ‘Escubac’이라고 이름 붙은 리큐르는 진의 향기로 대변되는 주니퍼베리(Juniper Berry)를 쏙 빼고 카다뭄, 건포도, 샤프란 같은 짙은 스파이스의 향을 잔뜩 끌어올린 술이다. 이 술을 마셔본 지인들의 반응은 완전히 찬물과 더운물로 확 나뉘었는데, 나는 당연히 아무도 안 볼 때 손목에 슬쩍 문질러볼까 고민할 정도로 좋았다.


출장을 다니며 공수했던 미수입 술은 슬프게도 이제 거의 다 떨어져 간다. 코로나19를 어깨에 짊어진 채 내년까지 보내야 하는 지금 시점에서는 국내 보틀숍을 뒤지는 수밖에 없다. 몇 해 전부터 가장 좋아하는 진 증류소로 꼽는 걸 주저하지 않은 퍼디난드(Ferdinand)의 술을 찾기 시작했다.

몇 해 전 스프레이로 향수를 뿌린 것처럼 향을 분사하는 진(Gin)을 찾다가 알게 된 독일의 증류소인데, 수입이 중단된 건지 보틀이 잘 보이지 않아 늘 구석구석을 뒤져야 한 병을 건져 올릴 수 있다. 이달엔 ‘자르 퀸스(Saar Quince)’라고 이름 붙은 퍼디난드의 진 베이스 리큐르를 구했다. 모과 같은 향이 나는 과일 퀸스를 더한 술로, 자두의 친척 격인 슬로(Sloe)를 더해 만든 슬로진과 비슷한 스타일이다. 화사한 향을 뿜는 화이트 진에 비하면 짙은 스파이스와 들큰한 향이 슬쩍 더해져 늦가을에 꽤 잘 어울리는 술이다.

이런 독특한 향이 존재감을 뽐내는 술을 마실 땐 주먹만 한 얼음이 필수다. 상온일 때 향이 좀 부담스러웠던 술도 얼음을 만나 스르르 풀어지면 훨씬 더 맛있어지기 때문이다. 요즘은 편의점의 돌 얼음도 꽤 크고 단단해서 급할 땐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지만, 이왕 ‘홈바’를 차리기로 마음먹었다면 아이스 트레이는 꽤 중요한 도구다. 위스키부터 이런 리큐르까지, 천천히 녹는 큰 사이즈의 얼음이 있다면 홈바의 수준이 훌쩍 올라가니까.

아이스 트레이 쇼핑 유목민으로 떠돌다 드디어 한 브랜드에 안착했다. 해외 직구를 통해 구매해야 하는 브랜드이지만 먹고 마시는 데에 돈을 아끼지 않는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한 제품을 만든다는 사실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W&P(wandpdesign.com)의 슬로건은 무려 ‘Eat & Drink, Better’다. 이곳에서 사각 얼음을 4개 만들 수 있는 예쁜 틀을 샀다. 온더락 잔에 꽉 끼는 큼직한 얼음 크기는 물론이고 손가락으로 누르면 훌렁 잘 벗겨지는 것까지 마음에 쏙 든다.

오늘은 독일의 크리스털 명가 나흐트만(Nachtmann)의 유색 크리스털 온더락 잔을 골랐다. 얼음을 넣고 퍼디난드 자르 퀸스를 쪼르륵 따랐다. 술이 얼음을 타고 내려오도록 한 뒤 잔이 차가워질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이 한 잔이 우리집 저녁 공기를 확 바꿔주길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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