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공자 가라사대
2022년 <마녀(魔女) Part2. The Other One>이라고 쓰고 모두가 <마녀 2>라고 부르는 작품을 내놓은 박훈정 감독이 1년만에 돌아왔습니다. 김선호 배우의 스크린 데뷔작이자 강태주, 김강우, 고아라, 이기영, 정다은, 저스틴 하비가 모인 <귀공자>죠. <마녀> 1편에서 최우식이 맡았던 배역명이 귀공자였지만, 딱히 그것과는 무관한(...) 영화입니다. 개봉일은 오는 6월 21일로 잡혀 있네요.
필리핀에서 불법 경기장을 전전하며 병든 어머니와 살아가는 복싱 선수 마르코. 어머니의 수술비 마련을 위해 평생 본 적 없는 아버지를 만나러 한국으로 향한 그의 앞에 정체불명의 남자가 나타납니다. 마르코 주위를 쑥대밭으로 만들며 숨통을 조이는 그를 필두로 재벌 2세 한 이사, 필리핀에서부터 그의 뒤를 쫓은 윤주 등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진 사람들은 마르코를 중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대호>같은 시대극 정도를 제외하면 박훈정 감독의 현대극에는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특징들이 몇 개 있습니다. 소위 말해 '폼을 잡는' 그만의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들이죠. 원어민이 아닌 것이 뻔한데 계속 섞어서 쓰는 외국어 대사, 자욱한 담배 연기, 빼입은 수트 혹은 가죽옷, 화면 전체를 감싼 푸른 톤, 소음기 달린 총성, 자신의 강함을 자랑하는 과시와 그에 이어지는 별 것 아니라는 갸우뚱이 대표적입니다.
마치 만화책을 그대로 실사로 옮긴 듯한 이 특징들이 한 영화에 전부 등장하는 일은 많지 않았지만, 이런 장면들을 보고 이 감독의 이름을 떠올릴 정도로 굳어지기는 했습니다. 그 정점이 되었던 영화가 지난 <마녀 2>였는데, 영화의 감상과는 별개로 눈에 밟히지 않을 수 없는 지점들이었죠. 장점보다는 단점으로 흐르기 쉬운 것들이기도 했구요. 이전까지도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던 것들이 정점을 찍었던 겁니다.
그래서인지 이번 <귀공자>에서는 확실히 힘을 좀 뺐습니다. 과한 캐릭터들이 모여 과한 장면들을 만들었던 전작들에 비하면 이번 영화엔 등장인물들의 머릿수부터 줄였죠. 아무 것도 모르는 주인공을 둘러싸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인물들이 각기 다른 의도를 가지고 조여 오는 구성은 <마녀 1>을 닮았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훨씬 가볍습니다. 팔랑팔랑 가벼운 것이 아니라 내려놓은 가벼움에 가깝죠.
덕분에 각본 자체에 집중하기가 편합니다. 마르코의 입장에 이입해 도대체 이 사람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은 뒤에는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막막함에 몰입하게 되죠. 사건의 전말을 한 번에 공개하는 것이 아니라 순차적으로 공개하는 덕에, 이건 밝혀져서 알겠는데 그렇다면 저건 또 뭔가 하는 물음표들이 남아 극을 이끌어 갑니다.
물음표의 크기와 위치를 비롯한 완급 조절이 썩 훌륭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켜보는 관객의 입장에서 딱 보면 기승전결이 읽히는 각이 있는가 하면, 보여준 힌트가 많은 것 같은데도 좀처럼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는 순간들도 있죠. 주인공을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으로 설정한 영화라면 주인공을 평균 이하의 바보로 만들지 않기 위해 이런 의문들 정도는 영화의 클라이막스까지 가져갈 필요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 중심엔 김선호의 귀공자가 있습니다. 겉보기로나 비중으로 보나 강태주의 마르코가 주인공 자리에 있기는 하지만, 영화의 제목이자 각본을 움직이는 사람은 귀공자죠. 처음부터 가장 많은 것을 알고 가장 적극적으로 이 사건에 개입하면서도 그 누구도 진정한 의도를 끝까지 알 수 없는 의문의 캐릭터입니다. 사실상 영화의 감상은 이 캐릭터의 감상과 직결되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죠.
여느 느와르나 액션 영화에서 보여주는 선악의 대립에 제 3의 영역을 등장시킨 셈입니다. 선악 구도를 벗어나겠다고 악당을 주인공 삼은 영화들도 어쨌거나 그들을 노리는 반대 진영을 설정해 선악 구도로 회귀하곤 하는데, <귀공자>의 귀공자는 말 그대로 누구의 편도 아니면서도 혼자서 판 전체를 흔드는 힘이 있죠. 때문에 마르코와 귀공자의 대립에서는 아주 신선한 박진감이 확보됩니다.
다른 인물들은 몰라도 이 역할의 김선호는 결코 대체할 수 없어 보입니다. 하얀 얼굴에 웃을 때마다 좌우로 찢어지는 입꼬리, 그러면서도 움직이지 않는 눈가가 캐릭터의 예측 불가능함과 어우러져 커다란 시너지를 내죠. 나중에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행동들을 설명하려 들 텐데, 원체 익살스럽고 양면적이라 웬만한 정신나간 소리를 해도 그러려니 하고 들을 준비를 하게 한달까요.
김강우의 한 이사나 고아라의 윤주 등 감독 전작들의 조연들 중 아무나 데려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캐릭터들 또한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들마저도 귀공자와 접점을 가지며 태생적인 단점들을 어느 정도 극복합니다. 그만큼 귀공자는 마르코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제목을 가져가는 이유를 스스로 증명하는데, 한편으로 이는 마르코마저도 일종의 도구로 소비해 버리는 필연적인 한계에 닿기도 하죠.
마르코 주변 귀공자, 한 이사, 윤주, 여동생 등 주요 인물들의 머릿수가 적은 데 비해 다루려는 사건의 크기는 생각보다 큽니다. 벌어지는 공간에 물리적인 제한을 둔다고 해서 사건의 잠재력을 강제로 잡아둘 수 있는 것은 아니죠. 분명 이보다 더 큰일이 벌어져야 할 것 같은데 더 끼워줄 사람은 없으니 이미 보여주었던 인물들을 망가뜨리는 쪽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전화 한 통으로 천만 달러를 움직일 수 있고, 필요에 따라서는 극도의 냉정함으로 사람 목숨 따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처리하던 사람이 갑자기 이성을 잃고 감정적으로 행동합니다. 치밀한 사이코패스가 전형적인 재벌가의 탕아로 전락하죠. 사건을 전개하고 주인공 측을 유리하게 만들어 주려 내리게 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인데, 그러지 않아도 도구화되던 캐릭터들은 더욱 단편적인 조각이 됩니다.
힘이 빠졌다고 해도 완전히 빠진 것은 아닙니다. 영어 대사 "nothing personal"을 직역한 듯한 "개인적인 감정은 없어"처럼 도무지 한국 구어체 정서와는 맞지 않는 대사들이 예고 없이 튀어나오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콧방귀를 뀌더니 담배를 물며, 세상 순진한 학생처럼 교복을 빼입은 채 웃음을 짓다가 아무렇지 않게 욕설을 내뱉는 등 눈과 귀를 스크린 안에 놔두질 않는 불협화음들은 여전히 잔존하죠.
맨몸과 총기 액션도 충분히 볼만하고 의외로 코미디도 약간 있으며 각본과 전개도 마냥 평이하지만은 않은 가운데, 초인에 가까운 절대적인 실력으로 괴상한 성격을 제멋대로 극복하는 한 명의 캐릭터와 그를 연기하는 배우에게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근래 충무로에서 만나본 캐릭터들 중엔 가장 인상적인 데뷔고 또 여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