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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혼 Oct 24. 2021

육아를 돕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요즘에는 집안일을 돕는다, 육아를 돕는다고 하면 안 된다고 한다. 바깥일을 남자가 하는 것이 당연한 시대는 지나갔고 집안일과 육아를 '같이' 하는 시대가 왔다. 우리 집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부엌에 출입하지 말라는 할머니의 말씀은 싹 잊고 두 팔 걷어붙이고 집안일을 '같이' 하였고, 아들이 태어난 후에는 육아를 '같이' 하게 되었다.


 육아에 정신없던 어느 날, 아들은 아빠라고 외쳤다. 아빠를 생각하고 의도하여 부른 것은 아니지만 발화의 순서가 엄마보다 앞섰다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엄마만큼이나 육아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놀라지 않았지만 아내는 조금 아쉬워했다.


 아빠라고 먼저 말하고 아빠를 보면 잘 웃는 것처럼 보이고 어딜 가나 아들이 아빠를 많이 쳐다봐서, 주위 사람들은 아들이 아빠를 많이 따른다고 말하지만 어디까지나 아빠는 재밌게 놀아주는 사람에 불과하다. 엄마가 없다면 아빠는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아들의 즐거움은 엄마 품에 있을 때 증폭되며 엄마가 없을 때와 있을 때 아들의 웃음소리는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한 때는 정말로 내가 아들을 더 잘 이해하고 세심하게 챙겨주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 적이 있었다. 여러 육아 이론을 접목시키는 아내가 냉정해 보일 때가 있었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내를 매정한 양육자라고 여긴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빠 주제에 엄마의 자리를 넘본 것은 큰 과욕이었다. 아들이 엄마 뱃속에 자리 잡은 순간부터 시작된 엄마와 아들의 관계는 따라잡기 힘들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아빠는 아들이 세상에 태어난 뒤에야 실존할 수 있었지만 10개월간 생사를 같이 한 엄마는 아들에게 목숨과도 같은 존재가 된 후였고 출발점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아기는 뱃속부터 엄마의 체취를 기억한다. 신생아 곁에 엄마의 모유가 묻은 손수건을 두면 손수건이 놓인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고 한다. 아들이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은 없지만 어느 정도 몸을 가누게 되자 엄마를 대하는 모습이 아빠를 대할 때와 다르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엄마에게 안기면 자꾸 품으로 파고들려고 하였고 아빠는 엄마가 팔 아플 때 사용하는 용도에 불과했다.


 심지어 엄마가 없어도 아빠는 엄마를 이기지 못했다. 하루 종일 잘 놀아주다가 우연히 엄마 잠옷에 아들을 내려놓았더니 아들은 엄마 품에서 하던 것처럼 얼굴을 반복하여 파묻는 모습을 보였다. 빈자리를 느껴서 끙끙거리는 강아지 같은 모습이 아니라 엄마가 정말로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들은 엄마의 빈자리를 느끼기 시작했다. 아들이 입을 오물거릴 수 있게 되면서 우는 소리가 단어의 모양새를 갖추었고 아빠라고 말할 때는 뚜렷한 이유가 없지만 엄마가 필요한 순간에는 자주 엄므, 엄마, 음므 하면서 울었다. 하루는 졸려하길래 엄마 잠옷을 주었더니 엄마를 찾아 당장이라도 일어설 것처럼 엄마를 소리 질러 불러댔다.


 우리 가족은 결국 전통적인 가족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요즘 아빠답게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아내와 동등한 위치에서 짐을 덜어주고 싶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뚜렷해지는 엄마의 존재감과 위상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고 아빠의 위치를 받아들여야 했다.


 서운하지는 않았다. 아들이 엄마를 원하고 엄마는 아빠보다 더 헌신적이니 서로의 끌림이 강력해지는 것은 필연이었다. 자연스레 육아의 주도권을 엄마에게 넘겨주었고 아빠는 엄마의 지시에 따르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아빠의 역할이 정해지자 집안이 더 잘 굴러가는 것 같았다. 아내가 시키는 일만 하면 되니 갈등이 줄고, 쓸데없는 에너지 소모도 줄게 되었다.


 결국 '같이' 하자고 시작한 육아는 이제 같이 한다고 말하기 어렵게 되었다. 같이 한다기보단 엄마가 주도하고 아빠는 시키는 것을 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렸지만 결과를 봤을 땐 나쁘지 않다. 잘하는 엄마가 잘하는 역할을 계속해서 잘하도록 아빠가 열심히 돕는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여자들이 집안일과 육아를 돕는다는 말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마도 제대로 도와주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동등하게 같이 하는 것은 이상에 가까우며 실제로는 누군가가 좀 더 잘하거나 많이 할 수밖에 없고, 육아에선 엄마가 더 많이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잘하는 엄마가 계속해서 잘하고 에너지가 소진되지 않아야 하는데 도와주는 아빠가 제대로 돕지 못하니 '돕다'라는 말의 어감까지 그 여운이 미치게 된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된다.


 아빠의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다. 나도 그랬지만 윗세대의 아버지들처럼 먹고살기 위해, 우리 가족이 더 잘 되라고 직장에, 일에 매달리는 것인데 육아를 같이 하자고 하고, 퇴근하고도 육아에 더 집중하라고 하면 부담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부부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명쾌한 해법은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우리 가족이 겪었던 것처럼 아빠가 조금 더 관심을 갖는다면 하루라도 빠르게 집안의 평화가 찾아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각자의 사정이 있고 제약이 있겠지만 육아에 시간을 많이 투자하거나 진지하게 육아를 탐구해보거나, 둘 다 동시에 해본다면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고 엄마도 비교적 인자하게 아빠를 조력자로 임명해줄지도 모른다.


 예외는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아빠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육아의 주인공이 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이 있다. 사장은 주인의식을 가지고 주인처럼 일하는 직원을 원한다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엄마(사장)가 될 수 없지만 엄마(사장)처럼 육아(일)하는 아빠(직원)는 가족에 보탬이 되고 처우 개선을 요구하기도 쉬워진다.


 시대가 바뀌었다. 회사의 주인이 아닌데 주인처럼 일하는 직원을 바라는 생각은 저물어간다. 워라밸을 중요하게 여기고 가족은 삶의 전부라고들 한다. 가족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가족을 행복하게 만드는 길은 주인의식을 가지는데서 시작한다. 이 땅의 아버지들이여. 주연이 되기 어렵다면 조연이 되어보자. (그것만이 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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