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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리멀리 Oct 13. 2020

김초엽 <인지 공간>

[총체적인 우주의 모습]

 제나와 이브가 사는 세계는 ‘인지 공간’이라고 불리는 격자 구조물이 존재한다. 그것은 그들 모두가 남기는 기록이고 기억이다. 사람들은 인지 공간에 걸어 들어가서 사유하고 사고한다. 하지만 이브는 예외다. 너무 작게 태어났고 너무 작게 자라서 인지 공간에 들어갈 수 있을 만한 몸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이브를 조롱하고 어른들은 이브를 불쌍히 여긴다. 인지 공간에 들어갈 수 있도록 사다리를 놓아주었지만 공간의 손상을 불러올까 봐 아래층 까지만 갈 수 있도록 했다. 모두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지만 그 모두에 이브까지 속해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 세계의 인지 공간은 지구인의 뇌 속에 있는 기억 장치가 외부에 있는 세계이다. 사람들은 모든 기억을 공유한다. 따라서 모든 것이 기억되는 것처럼 보이나 그럴 수 없다. 세 번째 달처럼. 그곳의 달은 세 개였는데 하나가 궤도를 이탈하면서 두 개만 남았다. 세 번째 달은 몹시 작은 존재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기억하지 않기로 했다. 인지 공간 밖을 탐험하다 들짐승에게 살해당한 이브 또한 그러하다. 사람들은 이브를 기억하지 않기로 한다. 너무 작은 존재들을 쉬이 잊기로 하는 세상이다. 인지 공간을 뇌 안에 가진 우리들의 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브는 스피어를 만드는 중에 죽었다. 스피어는 그의 발명품으로 휴대가 가능한 인지 공간이다. 손으로 만들어 조악한 장치이지만 그가 죽은 후 제나가 몇 년을 들여 보완하면서 그것은 어쩌면 모든 기억을 남기는 일을 가능케 할지도 모르는 장치가 된다. 작은 존재들을 누군가는 기억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밤하늘의 별을 한 공간에 모두 담을 수 없어도 각자의 별을 담다 보면 우리는 우주의 별을 모두 담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브는 인지 공간의 한계를 늘 지적했다. 기록되지 않으나 중요한 것들이 분명히 있으며 명료한 것들만을 남기는 일만을 당연시하는 일을 비판했다. 제나는 이브가 죽고 나서야 그의 말들을 이해한다. 보완한 스피어를 챙기고 인지 공간 밖으로 떠나 보기로 한다. 그의 걸음은 스피어의 필요를 증명해 줄 것이다. 무엇을 잊게 될지 무엇을 기억할지 모르지만 스피어를 가지고 가 보기로 한다.


 인지 공간이 있는 사회에서 이브의 몸은 장애를 가졌다. 왜소하고 약한 몸은 이브의 행성에서 살 때 제약이 무진장 많다. 사회는 이브를 불쌍히 여길뿐 그가 속하여 살 수 있도록 변화하지는 않았다. 이브가 태어나기 이전에는 그와 같은 사람이 없었을까, 잊기로 합의하며 잊은 일이 아닐까. 누구나 접근 가능한 공간에 접근할 수 없는 이들을 생각한다. 나는 비행기를 타고 세계일주를 시작했다. 만일 내가 휠체어를 타야만 이동할 수 있었다면 비행기를 탈 수 없었을 일이다.


 장애를 생각하다가 나는 인종을 떠올렸다. 내가 지내는 호주의 한인들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요새는 아시안들이 워낙 많고 열심히 일해서, 백인들을 다 몰아내고 자리 잡는다니까요.” 하지만 그들은 또 이렇게도 말한다. “아, 거기는 부자 동네예요. 백인들 동네. 한국 사람들은 거기 없어요.” 혹은 “원주민들은 다 변두리 살죠. 도시 한복판에는 없어요.” 비백인들은 속단되거나 쉽게 지워진다. 백인들은 비장애인들이 으레 그러하듯 속단과 삭제의 주체이다. 나는 이것을 한국 밖으로 나와서야, 그리고 이주 노동자가 되고 나서야 알았다. 내가 당한 속단과 삭제와 접근 불가능성은 지난날의 내 속단과 삭제들을 비추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어떤 존재들이 없거나 삭제되지 않아야 한다. 잊기로 하지 말고, 쉬이 잊지도 말고 자기 몫의 별을 최대한으로 담아 기억하고 붙잡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김초엽의 말처럼 ‘총체적인 우주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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