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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리멀리 Oct 31. 2020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답은 과연 정해져 있다]

 어부로 태어난 노인은 조각배를 타고 바다로 떠나고 자기 배보다 큰 청새치와 사흘 동안 사투를 벌인다. 그는 청새치를 끝내 죽였고 뭍으로 돌아간다. 나는 그 돌아가는 길에 오래 집중한다. 


 상어들의 습격으로 청새치를 잃은 노인 산티아고는 생각한다. “더구나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어떤 형태로든 다른 것들을 죽이고 있어,” 먹고살기 위해 다른 존재를 죽이는 일의 죄성을 생각하던 노인은 줄곧 그리워하던 소년 마눌린을 떠올리며 ‘그 소년은 나를 살려 주고 있어,’하고 또 생각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 속 ‘영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도 안 죽이면서 햇살과 빗물 만으로 살 수 있는 나무가 되고 싶었던 그는 인간 존재 자체의 비윤리성을 상징한다. 인간이 먹고사는 한 그 존재는 윤리적일 수 없다. 나는 그 작품을 읽고 삶이 가진 죄성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사는 일은 죽이는 일이다. 하지만 노인의 결론은 소년으로 귀결된다. 그는 청새치를 공격한 상어들을 죽인 일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자신뿐 아니라 모든 존재가 다른 존재를 죽인다는 현상에 기대어 합리화를 한다. 그리고 소년이 자신을 살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다른 인간을 살릴 수 있다. 그것이 존재의 합리를 찾아줄 수 있는 걸까. 주어진 삶을 살아낼 이유가 될 수 있나. 나는 알 수 없다.


 “노인은 어쩌면 자신이 이미 죽은 몸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두 손을 마주 잡고 손바닥을 만져 보았다. 손은 죽어 있지 않았고, 그래서 두 손을 폈다 오므렸다 함으로써 살아 있다는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바다 위, 사투 끝에서 삶의 증명은 고통에 있다. 손에 상처를 입은 채 상어의 공격에 좀비처럼 일어나 다시 싸우고 자신이 죽지 않았음을 통감으로 안다. 뭍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그는 아프다. 청새치를 이겼지만 바다 위에서 졌다. 바다 위에서 어쩌면 승리는 없다. 바다는 우주이고 거기에서 인간 실존이 할 수 있는 일은 패배뿐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인간이 승리를 할 수 있을까.


 “돛은 여기저기 밀가루 부대 조각으로 기워져 있어서 돛대를 높이 펼쳐 올리면 마치 영원한 패배를 상징하는 깃발처럼 보였다.”


 소설 첫 부분의 한 문장이다. 우리는 그의 돛처럼 영원한 패배의 상징일지도 모른다. 고통으로 삶을, 실존으로 패배를 증명하면서, 너무 멀리 나와 혼자 있게 된 것을 후회하면서 나아가고 돌아가는 일. 인간은 삶에서 온전히 승리할 수 없다. 인간은 온전히 이로울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은 다른 존재를 살릴 수 있다.


 노인은 상어와 싸울 때 파멸과 패배에 차이를 두고 파멸당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결국 진다. 나중에 다 빼앗겼더라도 청새치를 잡았다는 사실이 그가 패배하지 않았다는 반증이 될 수 있을까.  나는 ‘글쎄’라고 생각한다. 노인은 망망대해 위 잠깐의 승리 뒤 후회 가득한 패배를 겪는다. 차라리 잡지 않았었더라면, 너무 멀리 나왔어, 하면서 뭍으로 돌아간다. 노인이 뭍으로 돌아가는 길은 내게 항복처럼 다가온다.


 내내 외롭다. 영원한 패배를 홀로 디뎌 내는 일은 나를 긴장하게 하고 쓸쓸하게 하고 배고프게 한다. 나를 위해 울어주는 마눌린을 그리워하면서 항해를 지속하는 일, 뭍을 그리워하는 일, 돛대를 메고 언덕을 오르는 일 뒤에 패배가 있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고통으로 삶을 증명해야 하나. 여태 삶을 사랑해왔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삶이 반드시 빛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나는 이 작품에서 빛나지 않는 삶을 마주한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다. 나는 담보된 패배를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하지 않고서는 이 모든 삶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은데, 사랑할 자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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