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삼일 프로젝트 May 19. 2017

구둔역에서

양평에 위치한 작은 폐역


잠깐, 이 길이 맞아?
저 위에 뭐가 있다고?


구둔역(폐역)
주소 :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일신리 1336-2
연락처 : 031-771-2101





아뿔사. 으리으리한 신식건물로 탈바꿈 한  양수역을 보며 나도 모르게 탄식이 나왔다. 분명히 인터넷으로 검색을 했을 땐 소박한 모습의 옛 역사의 모습이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싶어 달려온 길이었는데. 허무한 마음에 더욱 꼼꼼히(?) 재검색을 해보았다. 구역사는 2008년에 철거되었다고 한다. 이제 그때의 모습은 사진으로만 볼 수 있게 된 셈이다. ‘스마트폰을 달고 살면 뭐하나, 똑똑하게 쓰지도 못 하는데…’ 한껏 자책을 한 뒤 아쉬움을 달래며 경기도 양평에 있는 다른 역의 정보를 검색하다가 구둔역을 알게 되었다. 위치를 확인하고 서둘러 구둔역으로 향했다. 





구둔역은 1940년 일제강점기 때 중앙선의 간이역 중 하나였다가 2012년 폐역이 되었다. 철거가 되었을 법한데 70여년의 세월과 매력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역사는 등록문화재 296호로 지정되며 다행히 보존되었다. 젊은 사람들에겐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대학생 승민(이제훈)과 서연(수지)이 데이트를 했던 장소로 잘 알려져 있다. 


양수리에서 출발해 구둔역으로 향하는 여정은 잔잔하고 평화로웠다. 창 밖으론 5월의 푸른 들판과 산, 그리고 저수지가 펼쳐졌다. 꾸불꾸불한 좁은 도로도 가끔 오가는 차량과 훈련 중인 군자주포를 제외하곤 한산하니 좋았다. 열어놓은 창문 틈으로 상쾌한 공기가 연신 오갔다. 곳곳에 아카시아꽃이 눈에 들어왔는데 향기가 절정일 때가 지났는지 향기를 맡을 수 없는 것이 좀 아쉬울 뿐이었다. 볕이 잘 드는 일부 논에서는 벌써 모내기를 시작했다. 




구둔역이 위치한 지평면의 일신리 마을은 작고 평범했지만 풍경이나 공기가 참 안정적이라는 기분이 드는 곳이었다. 인적이 드물지만 을씨년스럽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한풀 꺾인 오후의 햇살을 받아 마을 전체가 예쁘게 반짝반짝거렸다. 


구둔역에 도착하기까지 나와 일행은 두 번 정도 크게 당황했다. 하나는 분명 네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으며 가는 중이었는데도 길을 헤맨 것. 분명 역이나 기찻길이 보일 법한데 아무리 둘러봐도 그 흔적이 보이지 않아 적잖이 당황한 것이다. 다시 차를 돌려 한참을 나갔을 때야 구둔역을 알리는 이정표 앞에서 길을 잘못 들었음을 깨달았다. 다른 하나는 역에 거의 도착했을 때인데 차가 평지나 내리막 길이 아닌, 마을을 가로지르는 오르막을 올라가는 것이었다. “잠깐, 이 길이 맞아? 왜 자꾸 오르막으로 가지? 저 위에 뭐가 있다고?” 할 무렵에야 구둔역의 모습이 눈 앞에 등장했다. 그건 마치 깊숙한 어딘가에 존재하는 비밀의 장소에 닿았을 때나 느낄 법한 기분이었다. 당혹감과 안도감, 그리고 신비로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 속 등장인물이 된 것만 같았다. 




직접 본 구둔역은 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건물 그 자체로도 참 매력적이었지만 구둔역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 그 특별한 경험 덕분인지 더더욱 알고 싶어지는, 그런 공간이었다. 볕이 들어 환한 작은 대합실인 세심하고 또 과하지 않게 꾸며진 개인공간 같은 느낌이었다. 오래된 나무벤치, 키보드를 누르는 소리가 대합실 곳곳을 채울 것만 같은 옛 타자기, 폐역이 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들에게 기차시간과 요금을 알려주었을 안내판, 등등. 매표소는 카페로 꾸며져 운영이 되고 있었는데 평일임에도 많은 이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영화나 tv 프로그램의 영향일까, 싶다가도 요란하지는 않지만 실속있게 운영 및 관리가 되는 듯해 절로 고개가 끄덕거려졌다. 






카페를 포함한 소소한 공간들, 소원을 비는 나무, 기찻길 한켠에 서 있는 기차, 커다란 개 몽구를 포함한 고양이와 토끼, 돼지 두 마리, 등 아기자기한 볼거리도 좋았지만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여백이 많은 공간 그 자체였다. 더 이상 기차가 달리지 않는 널찍한 철도 위에 서서 주변 풍경과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절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역이 마을을 닮은 것일까 아니면 마을이 역을 닮은 것일까. 주변을 자유롭게 노니는 두 마리의 검정 고양이를 만났다. 무심한 듯 뽐내는 둘의 애교를 보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구둔역을 떠날 시간이 되었을 때 나도 모르게 역을 등지고 마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좀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걸까. 아니면 아까 이 곳에 처음 들어섰을 때 느꼈던 신비로움을 상기하고 싶었던 걸까. 차로 이동을 할 때도 자꾸 뒤를 돌아 역의 모습을 보았다. 기억에 남을 체험을 하게끔 해준 구둔역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다. 




길게 누운 햇살이 들판과 산에 닿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햇살은 열심히 모내기 중인 농부의 등에서도, 길가에 앉아 수다를 떠는 두 노인의 얼굴에서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 마치 아름다운 보석을 보는 듯했다. 아카시아꽃이 보일 때마다 창을 열어 코를 벌름거렸다. 조금이라도 달콤한 아카시아향기를 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구둔역도 그런 공간이었다. 화려하거나 과하지 않지만 어딘가 자신만의 향기를 품고 있는, 천천히 머물며 기어이 그 향기를 맡고 싶어지는. 결국 찾아낸 그 향기에 미소를 짓게 만드는. 몸과 마음 한켠에 오래오래 기억하게 만드는. 













사진, 조혜원
글, 박상환


매거진의 이전글 고구마 헌책방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