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원선 통근열차가 오가는 무인역
서울을 지나 의정부를 넘어서며 차창 밖 풍경은 점점 단조로워지고 도로 위의 차들도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했다. 점점 늘어나는 것은 군부대뿐. 날씨는 너무나도 더워서 쨍한 햇살에 모든 것이 타버릴 것만 같았다. 쭉 뻗은 도로 옆으로 우뚝 솟아 있던 가로수는 도로와 기찻길의 경계선이었다.
기찻길 너머로 작고 오래된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자동으로 조작되는 철도건널목이 나왔고 천막이 설치된 작은 역사가 나왔다. 신망리역이었다. 1954년 휴전 후 아무 것도 없었던 이 곳에 당시 미군이 피난민들을 위해 약 100채의 집을 지어주고 만든 정착촌 "new hope country"를 한자로 번역해서 신망리라 부르기 시작했다. 현재 신망리역은 경원선(용산-백마고지역) 통근열차가 오가는 무인역으로 운영이 되고 있다. 쭉 뻗은 기찻길 옆으로 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더위로 인해 역사와 마을을 돌아보기도 전에 쓰러질까(?) 두려워 서둘러 천막 안으로 들어가 햇빛을 피했다. 천막이 만들어준 그늘과 간간히 부는 바람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천막 안에는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한 (꽃이 그려진) 의자가 몇 개 구비되어 있었다. 노인 두 분이 말없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어디 가시는가? 신탄리역? 백마고지역? 열차 올라믄 아직 30분은 더 남았다오."
"아닙니다. 연천역을 가는 길에 신망리역이 있길래 한번 들러봤습니다. 아주 작고 한적한 마을이네요."
"여기가 상리(상1리)라오. 예전(6.25 전쟁 당시)엔 아무 것도 없는 땅이었지. 전쟁 끝나고 1954년에 미군들이 여기에 집 100채를 지어줬어. 그땐 열차도 안 다닐 때라 의정부나 동두천으로 피난갔던 사람들이 화물트럭 타고 이리로 와서 정착했지."
"아직도 기억이 나. 연천역 가 봤소? (신망리역 다음으로 연천역엘 갈 예정이라고 하자) 거기 급수탑이 있어요. 일제시대 때 만든거지. 그걸 미군들이 없애겠다고 폭격을 해댔어. 결국 부수지도 못하고 엄한 데다 폭탄을 떨궈서 커다란 구멍만 남기곤 했지. 폭탄이 떨어지면 연천역에서 한참 떨어진 이 곳에서도 큰 소리가 났어. 무서운 기억이야.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자네 같은 사람들은 모를거야."
차분하고 뚜렷한 목소리로 들려주시는 옛 이야기, 그리고 너무나 한산하고 평화로웠던 신망리역 주변의 한여름의 풍경, 그리고 그 머나먼 간극을 이어주려는 듯한, 지난 비극을 상기시켜주려는 듯한 주변 군부대에서의 사격훈련 소리. 땅땅땅-
노인의 귀한 말씀에 고마움을 전하고 천천히 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철길을 따라 길게 늘어선 집과 가게를 보며 군산 겸암동 철길마을을 잠깐 떠올렸다. 대부분 현대식 주택과 건물로 바뀌었지만 곳곳에 낡은 목재가옥이 눈에 들어오기도 했다. 문을 닫은 식당, 방치된 집들에게서 쓸쓸함이 전해질 법한데도 눈부신 햇살 탓인지 박제된 박물관용 세트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철도건널목과 가장 가까운 건물엔 오래된 약국이 있었다.
<유.약국>이라고 적힌 커다란 간판과 입구 주변으르 가득 채운 화분과 낡은 물건들이 인상 깊었다. 수많은 약통으로 비좁은 약국 안에서 나이든 약사와 마을주민으로 보이는 노인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여전히 이 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흔적과 어떤 이유에서건 이 곳을 떠나고 덩그러니 남은 공간이 품은 침묵이 곳곳에 깃든 마을이었다.
마을을 한바퀴 돌고 신망리역으로 돌아오자 때마침 기차가 들어왔다. 백마고지역으로 향하는 기차였다. 종소리가 울리며 철도건널목의 차단기가 자동으로 내려갔다. 너무나 한적하고 평화로운 마을의 배경 탓인지 전혀 다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멀리서 열차가 들어오자 아까 전쟁 때 이야기를 해주었던 두 노인이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멈춘 열차에선 꽤 많은 사람들이 내렸다. 단지 두 노인만이 열차를 탔다. 열차는 다시 서두르는 기색 없이 출발했다. 열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천천히 마을로, 각각의 공간으로, 향했다. 흐르는 땀을 닦으며 연천역으로 향했다.
+ 사진 : 조혜원 / 글, 박상환
신망리역
-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연산로 483번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