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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밍북 Dec 06. 2023

느지막이 달아오르는 건 페치카가 아니라 아저씨의 분노

바냐 아저씨 

작성: 노운아


 안똔 체호프의 연극은 셰익스피어 연극만큼이나 이야기하기 부담스럽다. 희곡을 읽은 사람, 공연을 본 사람, 연출해 본 사람, 연기해 본 사람이 넘쳐난다. 아울러 안똔 체호프로 박사 학위까지 받은 사람,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안똔 체호프에 대해서 많이 알고 추앙한다. 오늘 읽을 연극은 ‘바냐 아저씨’인데 사실 난 이 공연을 아직 보지 못했고 ‘벚꽃동산’과 ‘갈매기’ 공연만 관람한 적이 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바냐 아저씨를 읽은 후에도 왜 내가 이 작품을 선정했는지 후회만 들었다. 왜냐하면, 이 극에 대한 여러 감상이 이미 인터넷에 넘쳐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희곡을 읽은 후에 떠오른 건 과연 바냐 아저씨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연극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바냐 아저씨에 대해서 내 멋대로 상상해 봤다. 어딘지 세련미하고는 거리가 전혀 먼, 정제된 언어로 자기의 의견을 요목조목 설명하기보다는 일단 화부터 내고 엉긴 언어 뭉치를 토해내는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일 것 같았다. 과연 바냐 아저씨의 가족이 자랑스럽게 여겼던 저술과 지식이 그들에게 그럴만한 것이었는지를 한번 고민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나는 이번 이야기에서 ‘바냐 아저씨’의 대사를 중심으로 늦은 깨달음에 대해서 냉소적인 시선보다는 비탄의 시선과 동정의 목소리를 갖고 바냐 아저씨의 진짜 이름 ‘보이니쯔끼 이반 빼뜨로비치’를 바라볼 것이다.      


 1막에서는 보이니쯔끼, 아스뜨로프, 찔레긴을 중심으로 대화가 이루어진다. 늙은 유모 마리나가 교수의 불규칙한 생활 규칙으로 인해 사모바르를 준비하여 때를 맞추는 것이 고역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교수는 책을 읽거나 집필하느라 밤늦게까지 작업을 하고 아침 늦게, 그것도 점심이 되어서야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모두 교수의 이런 불규칙한 생활 방식이 그의 작업과 관련 있는 것이기에 알면서도 그 앞에서 불만을 표출하지는 않는다. 그 집에서 유일하게 교수의 첫 번째 아내의 장모인 마리야만 그를 자랑스러워할 뿐이었다. 그녀는 아들 보이니쯔끼와는 달리 책을 읽고 그것에 대해 생각한 것들을 책 속에 적는 것에 아주 흡족해했다. 다만 보이니쯔끼만 그 집의 분위기에 대해 날 선 토로를 한다. 


러시아 차 주전자 사모바루 사진 출처: Samovar.silver - 사모바르 - 위키백과


책: 벚꽃동산, 열린책들, 157쪽 보이니쯔끼의 대사 

보이니쯔끼: 없어. 항상 그렇지. 나는 옛날 그대로야. 아니 더 나빠졌어. 게을러지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오직 투덜댈 뿐이지, 늙은이처럼. 우리 늙은 수다쟁이, maman(어머니)은 언제나 여성 해방을 지껄이지. 한 눈으로는 무덤을 바라보면서도, 다른 한 눈으로는 자신의 그 똑똑한 책들에서 새로운 생활의 여명을 찾고 있거든.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늙은 수다쟁이라고 칭하면서 생활에 풍족함을 가져다주기는커녕 점점 더 살기 힘든 현실을 마주하는데도 책만 바라보면 새로운 세계를 열망하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비난조로 이야기하고 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의사 아스뜨로프는 교수에 대해서 묻는데 보이니쯔끼는 교수에 대해서도 혹평을 한다.      


책: 벚꽃동산, 열린책들, 153-154쪽 보이니쯔끼의 대사 

보이니쯔끼: …(중략) 그 사람은 차라리 자서전이나 쓰는 게 나을 거야…. 퇴직한 교수에다, 늙은 말라깽이에, 박식한 물고기. 통풍에, 류머티즘에, 편두통에, 질투와 시샘으로 간은 부었고…. 이런 물고기가 첫 부인의 영지에 살고 있지. 어쩔 수 없이 말이야. 호주머니 형편 때문에 도시에서는 살 수 없거든…. (중략)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한번 들어 보라고. 25년 동안이나 예술에 대해서 읽고 썼다는 사람이 예술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단 말이야. 25년 동안 그자는 남의 사상으로 리얼리즘이니 자연주의니 등등을 되뇌였을 뿐이야. 25년 동안 좀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그리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면 관심도 없는 그런 것을 읽고 쓴 거야…. (중략) 


 사실 교수는 보이니쯔끼의 전 매형이기도 하다. 보이니쯔끼의 누이가 교수와 결혼을 했지만 딸 하나를 남겨두고 죽었다. 지금 교수는 27살의 옐레나 안드레예브와 살고 있다. 매형이었던 교수의 고루함, 그것의 덧없음을 단지 비난하는 것이 다였을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건 교수의 부인을 사실 그는 좋아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교수의 부인인 옐레나와 소냐, 마리야가 함께 무대로 등장한다. 마리야는 하리꼬프에 사는 빠벨 알렉세예비치한테서 받은 책의 내용을 두고 7년 전에 지지하던 이야기를 지금 반박한다면서 작가의 사상 변화에 대해서 아주 무서운 일이라며 호들갑을 떤다. 보이니쯔끼는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는 또 삐딱하게 이야기한다.      


책: 벚꽃동산, 열린책들, 157쪽 보이니쯔끼와 마리야의 대사 

보이니쯔끼: 무서울 게 뭐 있습니까? (중략) 지난 50년간 말하고, 말하고 또 책자를 읽었으니, 이제는 그만둘 때도 됐습니다. 
마리야 바실예브나: 넌 내 말이 듣기 싫은가 보구나. 미안하다, 쟌. 그런데 너는 요즘 나도 몰라볼 정도로 변했어…. 예전에는 확실한 신념을 지녔고 또 빛나는 개성….


읽고 쓰는 것에 진절머리가 난 보이니쯔끼에게 예전에는 확실한 신념을 지녔는데 어찌하여 이렇게 변했느냐며 어머니는 못마땅함을 나타낸다.     

 

 이 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이니쯔끼와 소냐가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아야 한다. 보이니쯔끼와 마리야는 교수인 사람이 집안 식구가 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보이니쯔끼는 지금 살고 있는 영지를 돌아가신 아버지가 누이를 위한 영지 매입 이후 진 빚을 갚느라고 황소처럼 일만 해서 결국 모조리 갚았다. 아울러 25년 동안 영지를 관리하고 일하면서 매형이자 교수인 세례브랴꼬프로부터 5백 루블을 급료로 받았을 뿐이었다. 말이 급료지 그건 동냥하는 거지에게 돈을 주는 것에 지나지 않았을 정도로 아주 적은 돈이었다. 매형과 죽은 누이 사이에서 태어난 소냐가 다 자라서는 보이니쯔끼와 힘들게 영지를 관리하고 있었다.      


 여기까지만 읽어도 독자는 보이니쯔끼의 분노와 삐딱선을 충분히 공감하고도 남을 것이다. 일단 돈 문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책 읽기’와 ‘저술 활동’이 결국 세상을 바꾸지도 못했고 그저 무위의 악습만을 이 집에 옮기는 것 즉, 아주 쓸모없다는 것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그의 나이가 벌써 47살이 되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아주 크다. 그는 가정을 꾸리지도 못했고 죽은 누이와 함께 있던 옐레나를 처음 본 순간 그 아름다움에 매료됐지만 그녀가 매형이었던 사람의 정숙한 부인이 되었을 때 그 집이 얼마나 저주스러웠는지는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독자는 깊게 공감할 수 있다. 그런 전후 사정을 알면서도 보이니쯔끼의 편에서 서서 시대에 적응하지도 시대를 대변하지도 못할 정신적 활동을 비난할 법도 한데 그의 어머니 마리야는 철저히 그러지 않는다. 


 혼란한 시절에는 그러했던가. 그렇기 때문에 보이니쯔끼의 희생은 당연하였을까? 아들이 종노릇 하듯이 손녀와 고된 노동을 하는 걸 어머니 마리야는 왜 신념과 빛나는 개성으로 용인했는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내가 러시아 사람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그때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걸 수도 있다. 몰락한 지주, 새로운 지배 질서, 파괴되는 환경, 이런 격변의 상황에 무료하게 사는 인물이 현재를 살고 있는 내게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건 자명하다. 그런데도 어머니 마리야를 이해하는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난 싱겁게도 이런 생각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마리야는 그냥 그런 사람일 뿐이다. 내가 왜 이렇게 황당하기 그지없이 말할 수 있는 건 사회생활을 통해 유희를 추구하는 사람들만큼이나 활자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많이 봐 왔기 때문이다. 활자를 통해 어떤 것을 얻고 깨닫는 건 가치 있는 작업이고 험난한 인생을 버티게 해 주는 자양분으로 활용된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 활자가 주는 매력에 빠진 사람들 중에 더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저렇게까지 하는지 의아한 사람들도 왕왕 보곤 한다. 그들은 활자를 통해 얻는 깨달음보다는 활자가 주는 만족감을 느끼거나, 보여주기식으로 자신이 설정한 혼자만의 책 읽기 경쟁, 더러는 불만족스러운 주변 환경을 힘차게 자신이 개선시킬 힘이 없기에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마리야의 모습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들은 놀라우리만치 육체노동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다. 방에서 나오지 않고 꼼짝없이 있는 편이 차라리 더 나을 것이다. 


 2막에 들어서는 교수와 보이니쯔끼의 퉁명스러운 대화, 그리고 보이니쯔끼가 옐레나를 향한 마음을 표현하는 장면, 소냐와 아스뜨로프의 대화가 주된 이야깃거리이다. 교수는 통증으로 아주 짜증스럽게 이야기를 한다. 그는 그 집의 모든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폄한다. 그는 늙음을 한탄하고 살고 싶다고 외친다. 성공을 사랑하고 떠들썩한 걸 좋아하지만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멍청하게도 과거를 그리워하고 남들의 성공만을 지켜보는 것이 견딜 수 없다고 한다. 나는 그것이 지극히 오만한 생각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교수는 그곳을 떠날 생각을 한다. 옐레나의 대사를 통해서 그 집구석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The Grey House by Marc Chagall 출처: Lake Michigan in Motion Photograph by Rachel Cohen - Fine Art Ame


책: 벚꽃동산, 열린책들, 170쪽 옐레나의 대사 

옐레나 안드레예브나: 이 집은 엉망이에요. 당신의 어머니는 책자와 교수님을 빼곤 모두 다 혐오하고, 교수님은 짜증을 내며 날 믿지 못하고 당신을 두려워하고 있고, 소냐는 아버지에게 화가 나 있을 뿐 아니라 나에게도 화가 나서 벌써 두 주째 이야기도 하지 않고, 당신은 남편을 증오하고 자기 어머니를 드러내 놓고 무시하고, 짜증이 나서 오늘은 스무 번이나 울 뻔했어요. 이 집은 엉망이에요.

정말이지 엉망인 집구석이 맞는다. 그들은 서로를 대놓고 모욕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어리석다고 비난하고 있다. 누군가는 그 집을 떠나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문제는 어떻게, 언제 그 집을 누가 떠나는지가 3막에서 나타난다.      

 집을 원망하며 퇴장하려는 옐레나의 손목을 붙잡고 보이니쯔끼가 저주받은 철학 때문에 교수를 떠나지도 못하는 그녀에게 뭘 망설이느냐며 다그치지만 그녀는 그에게 질린다는 말을 하고 나간다. 아름다운 옐레나라고 부르짖지만 그녀의 빈축만 살 뿐이다.      


책: 벚꽃동산, 열린책들, 172쪽 보이니쯔끼의 대사 

보이니쯔끼: 10년 전 저 여자를 지금은 죽은 여동생의 집에서 처음 알았지. 그때 저 여자는 열일곱, 나는 서른일곱이었어. 그때 왜 저 여자를 사랑해 청혼하지 않았을까. (중략) 하지만 제기랄, 머릿속이 뒤죽박죽이군…. 왜 이렇게 나는 늙었지? 그녀는 왜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 그녀의 그럴듯한 말, 고루한 도덕, 세계의 파멸에 대한 터무니없고 고루한 생각, 이 모두 다 혐오스러워. 


 나는 보이니쯔끼가 언급한 ‘파멸에 대한 터무니 없고 고루한 생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 수 없다. 아마도 1899년에서 1900년대로 넘어가는 시기여서 우리가 밀레니엄을 겪었을 때처럼 어떤 혼란과 두려움이 그 시절을 지배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이니쯔끼는 미래에 대한 너무도 확고한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그 땅에 계속 남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기도 한 것이다. 그사이 소냐는 아버지 때문에 방문하는 의사 아스뜨로프에게 호감을 내보이지만 아스뜨로프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고 그는 자신이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독자는 분명 알 것이다. 남자의 그런 말은 당신에게 호감이 없다는 말과 같다는 것을.      


 3막에서는 이 극의 그 엉망인 집의 갈등이 극명하게 표출되는 장면이 나온다. 교수인 세레브랴꼬프는 몸이 아픈 건 참을 수 있어도 시골 생활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고 불평한다. 그러면서 그곳을 떠나서 도시에서 살고는 싶지만 그 땅에서 나오는 수입으로는 도시에서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잘 안다. 따라서 그가 사람들한테 제안한 방법은 일단 그 영지를 팔아서 유가 증권에 투자하면 수익이 더 늘어날 것이니 잉여금으로 교수와 옐레나는 핀란드에 아담한 별장을 살 수 있을 거라는 말이다. 보이니쯔끼는 교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자기가 잘못 들은 거 같다며 분노를 당혹해한다. 그, 그의 어머니, 소냐는 어디로 가야 하느냐는 질문에 교수는 황당하게도 차차 생각해 보자고 말한다. 사실 그 영지는 소냐의 것이다. 소냐 동의가 없으며 팔 수 없는 것이라며 교수는 한발 물러서서 중립적인 계획안이라고 진화를 했지만 보이니쯔끼의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책: 벚꽃동산, 열린책들, 203쪽 보이니쯔끼의 대사 

보이니쯔끼: 당신은 우리에게 하느님과 같았어. 당신의 글들을 외울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이제야 눈을 떴어! 나는 모두 다 안다고! 당신이 예술에 대해서 쓰지만, 예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내가 좋아했던 당신의 저서들은 한 푼의 값어치도 없어! 당신은 우리를 속인 거야! 


 보이니쯔끼가 저 말을 내뱉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회한과 절망 속에 있었을지 상상이 안 된다. 그가 젊은 날을 고된 노동으로 우직하게 일할 수 있었던 건 세례브랴꼬프의 지적 활동이 그와 어머니에게는 절대적인 어떤 믿음의 총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믿음이 산산조각 났을 때의 고통을 나는 간접적으로 희곡을 통해서 목도하고 있는데도 감당이 안 된다. 부모에 대한 신뢰, 내가 모태 신앙으로 떠받들었던 신에 대한 믿음이 철저히 깨진다고 상상해 보면 얼마나 끔찍한 고백인지 싶다. 철학이 다 무슨 소용인가. 예술이 다 무엇인가. 시대의 격동에서 꽃피우지 못한 학자, 그 학자를 우상처럼 떠받든 집안의 혼란이 매섭게 느껴졌다.      


 분노를 참지 못한 보이니쯔끼는 밖으로 나가 총을 구해 온다. 옐레나는 당장 그날 밤에 그 집을 떠나자고 남편에게 말한다. 교수는 보이니쯔끼를 한심한 놈이라고 취급한다. 한심한 사람이 과연 보이니쯔끼인지 참 고민해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보인즈끼가 거위가 꽥꽥 울다가 곧 그치는 것처럼 이 또한 소동처럼 지나갈 것이라고 하지만 그때 무대 뒤에서 총 소리가 울린다. 세례브랴꼬프는 보이니쯔끼를 말리라고 하고 옐레나는 보이니쯔끼로부터 권총을 빼앗는다. 그러나 보이니쯔끼는 교수를 향해 총을 쐈지만 그는 총에 맞지 않는다. 교수는 겁에 질린 채 그대로 서 있고 보이니쯔끼는 절망에 빠져서 의자에 주저앉으며 3막은 막을 내린다.      

 4막에 들어서는 인물들 간 갈등이 해소된다. 소냐의 호감을 거절한 아스뜨로프는 사실 옐레나를 흠모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그곳을 떠나 그와 함께 숲에서 만나자고 제안하지만 옐레나는 그 제안을 거절한다. 자살하려고 숨겨 두었던 약병을 아스뜨로프가 눈치채자 보이니쯔끼는 그 약병을 건넨다. 옐레나와 그녀의 남편은 그 집을 떠나고 그곳에는 보이니쯔끼, 소냐, 마리야가 남게 된다. 보이니쯔끼는 괴로워 하지만 소냐가 어떡하겠느냐며 그래도 살아야겠다는 말로 그를 위로한다. 소냐는 보이니쯔끼를 불쌍한 바냐 아저씨라고 칭하면서 그가 즐거움을 모르고 살아 왔지만 기다리다 보면 고된 노동에서 해방될 거라고, 그러면 그들은 쉬게 될 거라고 위로한다.      

출처: Lake Michigan in Motion Photograph by Rachel Cohen - Fine Art America

 믿었던 상대를 향한 존경과 신념이 모조리 사라졌을 때 남은 것이라곤 47살의 나이, 잃어버린 첫사랑, 고된 노동의 헛수고였다면 그 얼마나 피가 거꾸로 솟을 일인지 싶다. 그런 자에게 당신이 어리석고 아둔한 자였다고 누군가 욕하겠는가. 지면으로는 욕할 수 없다고 사람들은 바냐 아저씨를 위로하겠다. 그러나 실제 생활 속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교수가 입버릇처럼 하듯이 그를‘어리석은 놈’이었다고 비난했을 것이다. 그런데 누구나 한 번쯤 이런 뒤늦은 깨달음 때문에 당혹스러웠던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깨달음 뒤에는 자기 자신은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다고도 자만할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리만큼 신념이 깨지거나 뒤늦은 후회는 계속된다. 단 이런 풍파에서 내가 정말 깨달은 단 한 가지가 있는데 이것은 진리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신념이 깨진 뒤에는 그와 연관된 과거의 사람들은 모두 만나지 말 것, 단순히 차를 마시는 것도 삼가는 것이 내가 세운 원칙이 돼 버렸다. 이 극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유모와 몰락한 지주를 빼고는 모두 바냐 아저씨네를 떠났다. 그러면서 그들은 영원히 그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이미 깨진 것은 깨진 것 채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주워 담을 수 없으면 그대로 흘려보내는 것이 맞는다. 다만 뒤늦은 후회와 신념의 박살에 절망해서 앞으로의 날들을 망가뜨려서는 안 될 것이다. 무엇이 됐든, 그것이 굉장히 시대착오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우주, 이 세계는 타인을 향한 우상적 신념이 아니라 나를 믿는 맹목적 신념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것을 꼭 알아야 한다. 바냐 아저씨가 13년 후면 60살이 될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후회가 자양분이 돼서 그는 분명 그 전보다 더 무언가 값지게 살 것이고 소냐가 위로한 것처럼 즐거움을 알게 될 것이고 평안하고 안락하게 쉬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대문 사진 출저: Chekhov's "Uncle Vanya" at the Harold Pinter Theatre - The Theatre Times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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