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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모 Mar 19. 2019

하늘은 열린 지갑도 닫아준다

네덜란드 루르몬트 아울렛에서 생긴 일

남편은 쇼핑을 좋아한다. 결혼 후 쇼핑을 자제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쇼핑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사지 않고 마냥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살 생각만으로도 들뜨고 신나 한다.


나는 쇼핑을 즐기는 편이 아니다. 사고자 하는 것을 알아본 뒤 사러 가는 것이 쇼핑의 목적이다. 나에게는 살 것이 없는데 목적 없이 마냥 쇼핑몰을 돌아다니는 것은 고문까지는 아니더라고 힘든 일이다.


이렇게 다른 우리가 함께 하는 여행에는 남편의 즐거움을 위해 하루 쇼핑데이를 일정에 넣곤 한다. 독일 쾰른과 뒤셀도르프를 거쳐 마지막 날은 네덜란드 루르몬트(로어몬드) 아울렛으로 일정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계획했다.


로어몬드 디자이너 아울렛
Stadsweide 2, 6041 TD Roermond, 네덜란드
+31 475 351 777
https://goo.gl/maps/ZGkhujva3hB2


블로거들 사이에서 꽤나 유명한지 남편은 가기 전 사전조사에 열심히였다. 열릴 지갑을 생각하니 갑자기 후덜덜했다.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버스로 1시간가량 이동 후 네덜란드 루르몬트 아울렛에 도착했다. 그런데 날씨가 심상치 않다. 바람이 부는데 뭐 하나 날아갈 것만 같았다. 어쨌든 우리는 그곳에 도착했고 날씨야 좋아지겠지 하고 쇼핑을 시작했다.


남편이 쇼핑을 좋아하는데 내게 가장 좋은 점은 내 것을 잘 봐준다는 점이다. 그래서 게으른 나는 남편 덕에 항상 빠르고 수월하게 득템을 하곤 한다. 나는 언제나 그랬듯 빠르게 보고 빠르게 득템 했다. 남편은 이리저리 살펴보고 이 브랜드 저 브랜드를 다 본 뒤 모든 것을 최종 비교 후 결정을 내린다. 그러한 남편의 지난한 쇼핑 프로세스가 진행되던 중 갑자기


Attention! Attention!... Evacuation...


어쩌고 하는 방송 소리가 들렸다.


아니 evacuation이라고?

이건 무슨 영단어집에 나오던 단언데..

대피하라는 거 아냐??..


곧, 상점에 있던 점원이 현재 강풍으로 인해 아울렛 전체를 닫는다고 설명해주었다. 모든 사람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바람이 심상치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빠르게 대피 플랜을 진행한다니 놀라웠다. 우리는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냐며 재난영화의 엑스트라 마냥 손을 꼭 잡고 출구로 나가기 위해 빠른 발걸음을 옮겼다. 출구로 빠져나오자마자 가장 가까운 카페에 들어갔다. 아울렛으로 오가는 버스를 미리 예약해둔 상태라 아울렛에서 나왔다 해도 바로 숙소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모두가 빠져나온 아울렛


정신을 차리고 카페에 들어와 앉자마자 빠른 득템을 한 나와는 달리 이것저것 보다 타이밍을 놓쳐 쫓기듯 나오는 바람에 제대로 쇼핑을 하지 못한 남편의 억울한 얼굴이 제일 먼저 보였다.


날씨가 잠잠해지면 다시 오픈하지 않을까? 저기도 장사해야지 이 주말에 이렇게 빨리 닫으면 손해가 얼마나 크겠어. 여기 앉아서 좀 기다려보자. 어차피 지금 숙소로 돌아갈 수도 없잖아.


남편을 살살 달래며 뒤로는 버스 시간을 바꿀 수 있을지 알아보았지만 이런 상황이라 다들 일찍 돌아가는지 버스는 모두 만석이었다. 여기서 그냥 3시간 넘게 앉아서 기다려야 할 상황이었다.


일단 맥주를 시키니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강풍에 카페안으로 쓸려들어온 낙엽들 그리고 안정을 준 맥주

그리고 우리는 다시 열릴지 모르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그 카페에 3시간을 앉아있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 여행에서 먹은 것 중 어떤 게 제일 맛있었는지, 어떤 장소가 제일 좋았는지, 어떤 순간이 제일 즐거웠는지, 이 상황은 얼마나 황당한지, 저 옆 테이블의 가족은 어때 보인다는 둥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뜻하지 않은 여유시간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여행이 주는 묘미 아닐까?


오늘은 쇼핑데이였지만 여행시간 중 가장 오래 앉아 쉬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 가장 여유로운 하루가 되었고 오래간만에 돈 좀 쓸까 하고 나왔지만 하늘은 우리의 지갑을 강풍으로 닫아주었다.(남편 미안하지만 하늘아 고마워^^)


열심히 계획해도 한 치 앞을 모르는 여행처럼 우리 인생도 비슷하지 않을까..

갑자기 강풍이 닥친 들 쉴 곳을 찾아 우리만의 시간을 만들어내는 것 같이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면 그 속에서 우리만의 행복을 찾아가는 게 인생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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